본문내용
1. 서구 열강의 접근과 조선의 대응
1.1. 제국주의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은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식민지를 차지하려는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산업 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면서 상품 판매 시장, 원료 공급지, 잉여 자본 투자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국내 문제 해결과 국가 위신 고양을 위해 대외 침략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제국주의 팽창의 논리적 기반으로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인간 사회와 국제관계에 적용한 것과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제국주의 열강은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19세기 중엽부터 동아시아로 적극 진출하였다.
아프리카와 인도의 침략에 이어 동아시아에서는 청과 일본이 개항하게 되었다. 청은 영국이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밀수출하자 이를 단속하다 아편전쟁에서 패하여 개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영토 할양, 항구 개항, 영사재판권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불평등 조약 체제가 성립되었다.
한편 일본은 에도 막부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하자 미국 함대의 무력 시위로 개항을 요구받아 미ㆍ일 수호 조약을 체결하여 불평등 조약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처럼 제국주의 열강은 우월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식민지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2. 영국의 침략으로 청이 개항하다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청에 밀수출하였다. 청은 국민의 건강을 위해 아편 단속을 강화하였으나, 이에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키며 침략하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청이 강제로 개항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청은 막대한 은 유출로 인한 무역 적자 해결을 위해 아편 단속을 강화하였다. 이에 영국은 아편 밀수출을 단행하였고, 청이 이를 단속하자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을 공격하였다. 결국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저우 등 항구를 개항하는 등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로써 청은 영국의 경제적 침략과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이처럼 청의 개항은 영국의 침략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청은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서구 열강의 경제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는 19세기 중반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3. 일본이 미국의 군사적 위협으로 개항하다
에도 막부는 서양 국가들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에게만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853년 미국의 퍼리 함대가 무력시위로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자 일본은 더 이상 외세의 압력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여 1854년 미ㆍ일 화친 조약, 1858년 미ㆍ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도 불평등 조약 체제에 편입되었는데, 이 조약들을 통해 영사 재판권과 최혜국 대우를 허용하게 되었다.
2.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통상수교 거부정책
2.1.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대내적으로 세도가의 폐단과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으로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서양 세력의 접근에 따른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세도가들의 폐단을 타파하고 지방 경제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통치 체제 정비 정책을 추진하였다.
첫째, 세도 정치가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인재를 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관리 등용에서 문벌과 음서 등 세도 정치 폐단을 극복하고 실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고자 하였다.
둘째, 의정부와 삼군부를 분리하여 정치와 군사 업무를 구분하였다. 정치와 군사 권력이 분리됨으로써 왕권을 보다 안정화시키고자 하였다.
셋째, 법전 정비 사업을 통해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대전회통』 편찬을 통해 법령 체계를 정비하고 제도를 정돈하여 왕권과 국가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 타파, 인재 등용, 정치와 군사 기구 분리, 법전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부족한 재정으로 인해 원납전 징수와 대량 백성 동원 등 문제점이 발생함으로써 양반과 농민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었다.
2.2. 민생 안정을 위해 삼정을 개혁하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적인 농민 봉기와 농민층의 생활 곤란을 해소하기 위해 삼정을 개혁하였다. 삼정이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穀)을 의미하는데, 이는 당시 조선의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먼저 전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지주에게 의존해야 했던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적발하여 토지 소유권을 확실히 하였다. 이를 통해 지주와 농민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군정 개혁에서는 군포 징수 제도를 바꾸었다. 기존의 양반층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정책 대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경감시키고자 하였다.
환정 개혁은 환곡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환곡은 정부가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와 함께 돌려받는 제도로, 지방관의 부정과 백성들의 착취가 심각한 문제였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환곡 제도를 마을 단위로 자체 운영하도록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은 삼정 개혁을 통해 농민층의 생활 안정과 민생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재정 부족과 양반층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3. 서원을 철폐해 민생 안정과 재정 확충을 도모하다
흥선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여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 확충에 힘썼다. 당시 서원은 지방 사족의 세력 기반으로 변질되어 농민 수탈과 면세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대부분을 철폐하였다.
서원 철폐를 통해 흥선 대원군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첫째, 서원 철폐로 농민에 대한 수탈이 줄어들어 민생 안정에 기여할 수 있었다. 둘째, 서원 소유 토지와 자산을 국가에 귀속시켜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이는 국가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조치였다.
하지만 서원 철폐 조치는 양반 유생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흥선 대원군은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또한 서원 철폐로 인한 문화적 손실도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결과적으로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은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 확충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지만, 정치적 부담과 문화적 손실이라는 부작용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2.4. 프랑스군의 침략을 물리치다
병인박해로 인해 러시아의 연해주 차지로 위기감이 고조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와의 동맹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천주교 금지 주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