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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의 역사적 배경
1.1. 수에즈 운하 건설의 역사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현재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자리는 수에즈 운하가 착공되기 이전에도 주변 지역의 많은 고대인의 도전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인 기술적 한계와 정치적인 이유로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수에즈 운하 지역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운하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국제적으로 이뤄지는 거래와 상업지구를 활발하게 하는 역할도 있었지만, 군사를 옮기는 목적, 나일강의 물을 끌어다 씀으로써 농작물을 기르고, 많은 사람이 비옥한 토지에서 더 많은 음식을 생산하게 될 가능성까지 제공해 주었다.
기원전 6세기에 네코 2세는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려 했으나 인명피해와 기술문제로 중단하였고, 이후 페르시안 제국의 다리우스 황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고대 운하를 완성했다. 이 고대 운하는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찰에서 발견되었다.
나폴레옹은 주저하지 않고, 이집트 정찰에서 운하를 만드는 방법을 모색했다. 1700년대 후반 현대의 운하가 만들어지는 첫 번째 과정이 시작된다. 나폴레옹은 운하가 영국을 견제하는데 필요한 전략적 가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가로지르는 운하가 있다면, 물품 공급이 쉬워지고 이용세를 받으면서 영국과 무역 마찰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을 따르는 정찰 학자들은 홍해가 지중해보다 30ft 더 높고, 운하를 만들 시 나일 델타에 치명적인 홍수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틀린 측량으로 판명되었지만, 당시 나폴레옹은 운하 건설에 대한 꿈을 접어야만 했다.
1833년 생시몽(Saint-Simonies)이라는 프랑스의 학자 그룹은 카이로에 도착하여, 수에즈 운하 연구에 관해서 관심을 가졌고 다시 운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의 술탄이었던 무하마드 알리는 이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생시몽과 프랑스 탐험가 벨레폰드는 지협 조사를 통해 홍해와 지중해 사이에 고도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며, 운하 건설의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무하마드 알리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
1849년 알리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얍바스가 통치를 하지만, 5년 후인 1854년에 죽었고, 그의 삼촌인 사이드가 통치하게 되면서 수에즈 운하 역사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기를 가슴에 품은 한 사내가 등장했다. 나폴레옹의 운하 부분에서 가슴을 뛴 이 사내의 이름은 페르디낭 드 레셉스로 알렉산드라에서 프랑스 영사로 근무하는 외교관이었다. 그는 운하의 계획에 열정이 넘쳐,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통로가 되어 물류 이동에 편하다는 점, 중동 아시아와 지중해의 문화 교류가 생긴다는 점, 유럽의 무역거래 성장과 이에 따른 자국의 이득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레셉스는 이런 이유로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 사이드를 설득하여 양허권을 얻어낸다. 레셉스는 이집트 법인으로 '만국수에즈해양운하회사'를 설립하였고, 99년 뒤에 이집트에 반환한다는 조항을 합의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1859년 4월 5일 착공이 시작되었다.
공사는 중간중간 자금 경영난과 영국과 오스만 국가의 방해, 강제노동이라는 윤리적 문제, 전염병 등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모두 헤쳐나가면서 10년이라는 시간 이후 1869년 11월 17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낙성식을 진행했다. 수에즈 운하는 성대한 환영과 함께 시작되었고, 레셉스가 예상했던 만큼보다 더 큰 파급력을 가져다주었다.
1.2. 파나마 운하 건설의 역사
1513년 9월 25일, 스페인 탐험가 발보아는 파나마 여정을 떠나면서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을 산 정상에서 지역 원주민에게 소개받는다. 그 광경을 본 발보아는 이를 당시 스페인의 왕이자 로마의 황제인 카를 4세에게 전하고, 대륙을 통치하는데 매우 전략적인 요충지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지지를 약속하며 공사 전에 필요한 사전조사를 허가해준다. 모든 조사는 완벽하게 실행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한계가 있음을 보고 받는다. 당시 이 사업이 성공을 하게 되었다면, 현재의 모든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나마 운하가 다시 크게 논의가 된 시점은 19세기 수에즈 운하가 지어지고 난 바로 후이다. 국가 간 교역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 증기선 발달로 인한 물류 이동과 여객 서비스 같은 운항사업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이 파나마 운하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고, 사업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게 된다. 공사는 당시 수에즈 운하를 완성한 당 시대의 세계적 영웅 레셉스가 맡게 되었고, 모든 사람은 77km밖에 되지 않는 파나마 운하사업이 비교적 쉽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완공했던 수에즈 운하는 공사의 규모나, 길이를 놓고 보았을 때 파나마 운하보다 훨씬 규모가 있는 사업이었다. 예를 들어, 수에즈는 7천500만 세제곱미터(Cubic meters) 양의 지면을 파야 했지만, 파나마 운하는 4천500만 세제곱미터 정도로만 예측되었다. 이후 모든 전문가는 큰 실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뿐만 아니라, 레셉스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수에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