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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일제강점기는 한국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한국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지배하고자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계는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본 보고서에서는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고, 이 시기 한국의 근대화 운동과 국권회복운동, 그리고 식민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 등을 자세히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이해하고, 이 시기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노력과 저항정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모습
2.1. 식민지 근대의 보편성과 특수성
한국은 2천년 이상 독립국가로서 잘 정비된 정치체제를 유지하며 문화적으로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이는 다른 식민지와 구별되는 특성 중 하나이다. 이런 까닭에 일제는 한국에서 직접통치를 통한 동화정책과 개발정책을 강권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 제한적이지만 황국신민화, 경제성장의 현상이 나타났다. 일제는 서국제국주의에 대항하며 안전보장 실현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군사적,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는 가혹하고 잔인했다. 이에 높은 문화역량, 정치체제를 가진 한국인은 격렬히 저항했고 일제는 이를 탄압하고자 더욱 난폭하게 억지력을 행사하였다. 다른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경제적 이득을 가장 중시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하지만 일제 역시 경제적 이득을 함께 추구했음으로 한국은 군사적 억압 외에도 경제적 수탈에도 시달렸다. 일본은 영국의 간접지배와 달리 프랑스와 같은 직접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일제의 한국지배의 궁극적 목표는 과도하게 발달된 무소불위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이에 절대 복종하는 황국신민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받을 수있고 그러기 위해서 일본인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사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한국인은 모든 면에서 일본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고 일본은 이를 은폐하고자 이중적 문화담론을 전파하였다. 서양에게는 열등감을 동양에게는 우월감을 표시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동화정책은 권리의 평등을 수반하지 않고 오직 의무의 평등만을 강요한 정책이었다. 한국인은 일제에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일제의 정책에 휘둘려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 결과 새 국가 건설 때에 지도자의 빈곤과 정치력의 결여라는 문제에 부딪쳤다.
2.2. 일제의 한국 지배 정책의 시기별 변화
합병 조약 성립 이후 일제는 일시동인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일본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 외지로 규정하였다. 조선인들은 일본 헌법이 정한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조선 총독의 자리는 육군 대장의 차지가 되었고 그 결과 식민기간 내내 조선은 반군정적 통치 아래 놓여있었다.
10년대에는 이른바 무단통치를 폈는데 한국민의 반발을 헌병경찰로 대변되는 폭력 수단으로 억압한 채, 조선을 군사기지화하고, 식민지로 재편하기 위한 기반 닦기 사업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화 정책을 전개하면서 민간 언론을 철저히 말살한 채, 야만 상태에 놓여있는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한 것으로 대대적 선전을 시도하였다. 한국은 천황의 적자이지만 민도가 뒤떨어져 차별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선 일본인의 지도에 순종해 문명화해야한다며 민족차별정책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강압적이고 민족차별적 식민통치는 3·1운동이라는 거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민족의식이 강인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좀 더 세련되고 노련한 통치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문화통치였다.
총칼을 동원한 폭압적 통치 방식 대신 문화라는 가면을 쓴 유화적 통치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헌병경찰 제도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태형령을 폐지하였다. 또 언론·집회·결사의 권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여전히 엄격한 검열과 감시아래 놓여 있었지만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조선어 신문이 창간되고 수많은 사회단체가 등장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규제를 푸는 한편 친일단체를 양성하거나 조선인 자본가를 지원해 민족 진영 내 분열을 유도하였다. 또 일반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사회교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동화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식민사관을 정립하며 한국의 역사에서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을 끌어내었다. 한국이 사대적이고 독립된 국가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날조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심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납세 장려 등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깨우치기 위한 사업도 벌였다.
또 일본의 쌀 공급문제를 해결하고자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조선인 지수의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