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일제 침략 아래 식민지 정책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한국에 대한 다양한 정책을 펼치며 식민지화를 도모하였다. 한국은 2천년 이상 독립국가로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은 다른 식민지와는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한국의 높은 문화역량과 정치체제로 인한 것이다. 이에 한국인들은 격렬한 저항을 보였고, 일제는 이를 강압적으로 탄압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한국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한국은 군사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에 시달렸으며, 이는 민중들의 생활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은 계몽운동과 의병전쟁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따라서 본 보고서에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 한국이 경험한 다양한 정책과 민중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일제의 한국 식민지 지배와 저항
2.1. 일제의 식민지 근대와 동화정책
일제는 한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후 한국을 일본의 문화와 제도에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일본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 외지로 규정하였고, 조선인들은 일본 헌법에 정한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법률에 복종하고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조선 총독의 자리는 육군 대장의 차지가 되었고, 이에 따라 식민기간 내내 조선은 반군정적 통치 아래 놓여있었다.
일제는 10년대에 이른바 '무단통치'를 폈는데, 한국민의 반발을 헌병경찰로 대변되는 폭력 수단으로 억압한 채 조선을 군사기지화하고 식민지로 재편하기 위한 기반 닦기 사업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화 정책을 전개하면서 민간 언론을 철저히 말살한 채, 야만 상태에 놓여있는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한 것으로 대대적 선전을 시도하였다. 일본은 한국이 천황의 적자이지만 민도가 뒤떨어져 차별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선 일본인의 지도에 순종해 문명화해야한다며 민족차별정책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강압적이고 민족차별적 식민통치는 3·1운동이라는 거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민족의식이 강인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좀 더 세련되고 노련한 통치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문화통치'였다. 총칼을 동원한 폭압적 통치 방식 대신 문화라는 가면을 쓴 유화적 통치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헌병경찰 제도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태형령을 폐지하였다. 또 언론·집회·결사의 권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여전히 엄격한 검열과 감시아래 놓여 있었지만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조선어 신문이 창간되고 수많은 사회단체가 등장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규제를 푸는 한편 친일단체를 양성하거나 조선인 자본가를 지원해 민족 진영 내 분열을 유도하였다. 또 일반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사회교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동화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식민사관을 정립하며 한국의 역사에서 일선동조론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을 끌어내었다. 한국이 사대적이고 독립된 국가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날조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심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는 한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후 한국을 일본의 문화와 제도에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2.2. 일제 지배의 시기별 특징
10년대에는 이른바 무단통치를 펼쳤다. 한국민의 반발을 헌병경찰로 대변되는 폭력 수단으로 억압한 채, 조선을 군사기지화하고, 식민지로 재편하기 위한 기반 닦기 사업에 주력하였다. 3·1운동이라는 거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민족의식이 강인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좀 더 세련되고 노련한 통치방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