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68혁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68혁명 개관
1.1. 68혁명의 전개과정
1.1.1. 배경
1.1.2. 3월 22일 사건 이후 전개
1.1.3. 노동자 참여와 최고조
1.1.4. 결과와 종식
1.2. 독일과 미국의 68혁명
1.2.1. 독일 68혁명의 전개
1.2.2. 미국 히피문화와 68혁명
2. 68혁명의 사상적 배경
2.1. 마르크스주의의 재해석
2.1.1. 마르크스의 정치자본론 비판
2.1.2. 마르크스, 라이히, 프로이트
2.2. 마르쿠제의 신좌파 이론
2.2.1. 1차원적 인간론
2.2.2. 마르쿠제의 억압 이론
2.3. 마오주의와 주체사상
3. 68혁명의 특징과 성격
3.1. 68혁명의 특징
3.1.1. 반체제와 반파시즘 운동
3.1.2. 반자본주의, 반권위주의
3.2. 68혁명의 성격
3.2.1. 문화혁명으로의 전환
3.2.2. 소외된 자의 해방 운동
4. 68혁명의 영향
4.1. 정치적 영향
4.1.1. 정치세력의 변화
4.1.2. 녹색당 출현
4.2. 경제적 영향
4.2.1. 수정자본주의 도입
4.2.2. 노동환경 개선
4.3. 사회문화적 영향
4.3.1. 환경운동과 반핵운동
4.3.2. 성해방과 동성애 운동
4.3.3. 예술의 변화
5.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68혁명 개관
1.1. 68혁명의 전개과정
1.1.1.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서양 각국에서는 베이비붐이 나타났다. 프랑스 역시 1947-49년에는 매년 87만 명 이상이 태어났고 50년에도 86만 명 이상이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1945-1950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만17세가 되어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시점인 1962-1967년에 대학생 수도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0만 명도 안 되던 대학생 수가 1960년대 말에는 65만 1천명에 이르게 되었고, 그만큼 기존 엘리트로 여겨지던 대학생의 위상도 변화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에는 대학교가 늘어난 학생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공교육부 장관인 푸세의 고등교육 개혁 관련 시행령으로 인해 대학은 전공세분화, 교양-학사-석사 3기과정운영 등을 힘겹게 운영해야 했고, 이러한 부담감은 다시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학생들의 수강선택에 대한 자유가 부족했고, 수 백 명에서 천 명 이상까지 듣는 대형 강의가 열렸다. 대학공간의 협소함,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대형 강의, 교수와 학생 간의 위계적 관계, 대학 교원 수 부족 등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누적되어갔다. 프랑스의 경우 기숙사의 통금 시간이나, 남녀 학생들이 각각 다른 성별의 기숙사를 방문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 등도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생들은 대학의 문제들에 거부감을 느꼈고, 조교들은 대학에서의 승진 기회 차단, 교수와의 수직관계 등에 불만을 가졌다. 이는 68운동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1.2. 3월 22일 사건 이후 전개
3월 22일 학생들이 낭테르 대학 행정관을 점거하자, 학교는 4월 1일까지 휴강하기로 잠정 결정하였다. 그러나 4월 1일에도 여전히 학생들은 강의실을 점거하고 토론을 벌였다. 4월 26일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인 피에르 쥐켕의 연설을 막는 사건도 있었다. 5월 2일 학생들은 낭테르 대학 강당을 점거했고, 그라팽 학장은 휴교 조치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학장은 다니엘 콘 벤디트를 비롯해 학생 8명을 징계하겠다고 발표하였고, 5월 3일 소르본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하였다. 이를 계기로 낭테르 학생들의 시위는 학교 담장을 넘게 되었다.
5월 3일 약 500명의 학생들이 소르본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다니엘 콘 벤디트 등 3월 22일 활동가들을 지지했고, 베트남 전쟁 반대 등의 논쟁도 진행했다. 대학은 경찰들을 부름으로써 대응했고, 경찰들은 캠퍼스에 난입해 학생들을 진압했다. 인근 학생들은 이를 듣고 자발적으로 참여해 경찰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차량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결과 6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경찰의 개입으로 시위는 소수의 활동가들의 범위를 넘어 대중적 학생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소르본 대학은 폐쇄되었으나 시위는 멈출 줄 몰랐고 학생들은 생 미셸 대로로 나가 시위했다. 이때 무장한 경찰이 학생들을 폭행하는 모습을 언론에서 접한 프랑스 대중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전국프랑스학생연합과 전국고등교원조합은 5월 6일부터 대학 및 고등학교의 무기한 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총연맹은 학생들의 움직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5월 6일 전국프랑스학생연합이 마비용 사거리와 생 제르 맹 데 프레 광장에서 시가전을 벌였고,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시위자는 1만 명에 이르렀고, 바리케이드가 무너질 기미가 없자 경찰들을 직접 돌파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은 노동자들, 블랙재킷으로 불리는 노동계급 청년들, 실업자들,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했던 날이었다. 같은 날 혁명적공산주의청년단에 의해 학생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소르본에서 개최되었다. 이를 통해 모든 운동의 대표들은 자유롭게 발언하고 그들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5월 10일에는 운동이 더욱 확대되어 에드몽 로스탕 광장 사거리를 수천 명의 시위대가 채웠다. 정부는 경찰을 철수시키고 소르본을 다시 개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시위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5월 11일 이른 아침 경찰과 공화국보안경찰대는 바리케이드 철거를 지시받았다. 경찰 개입은 노동조합이 학생 운동과 연계하게 하였다. 노동총연맹과 프랑스민주노동연맹도 경찰의 책임을 물으며 5월 13일 총파업을 예고했다. 바리케이드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블랙재킷, 노동자들이 지켰고 많은 외국인들과 여성들도 이 싸움에 참여하였다. 그날 밤 조르주 퐁피두 총리는 유화책으로 체포된 학생들 석방과 소르본 대학 개방을 약속했다. 이는 사실상 드골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5월 13일에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노동자와 연합하여 드골의 사임을 촉구했다.
1.1.3. 노동자 참여와 최고조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은 5월 15일부터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어 16일 파리 교외의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이 항공, 지하철, 철도회사 등으로 번져나갔다. 5월 18일에는 9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함으로써 프랑스에는 공권력과 정부의 기능이 중단된 듯했다. 5월 20-21일에는 거의 전국 지역에 걸쳐 연속적인 파업이 발생했고 수백 개의 공장이 노동자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단순히 르노 공장뿐만 아니라 조선소, 철강산업, 항공관제소, 백화점, 병원 등이 5월의 혁명적 운동에 가담했으며, 전체 작업장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시위에 참여했다. 이에 정부는 대규모 진압에 나섰지만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25일에는 언론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신문 배포와 TV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처럼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공장 점거는 어느 때보다 격렬한 투쟁이었고, 그 규모 또한 1936년 반파시즘 인민전선 이후 가장 큰 것이었다.
1.1.4. 결과와 종식
정부와 노조 지도부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더 이상 단기적인 경제적 보상에 만족하지 않고 장기적인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하면서 타협을 거부하자 프랑스 사회는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드골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총선거 실시를 선언했고, 이에 따라 무질서한 시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6월 23일과 30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드골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기존 선거구 편성이 드골파에게 유리했고,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과 젊은 노동자들이 투표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68혁명은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종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프랑스 사회는 여러 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대학 개혁, 노동자 권익 향상,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 등 68혁명이 이끈 변화의 물결은 이후 프랑스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동성애 운동의 대두 등 당시의 사회문화적 변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68혁명은 비록 정치적으로 실패했지만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2. 독일과 미국의 68혁명
1.2.1. 독일 68혁명의 전개
1966년 드골 대통령과 기민당-사민당 연립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서독 사회에는 점점 늘어나는 학생 수에 비해 질적 수준이 떨어지는 교육 환경으로 인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또한 나치즘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에 따라 당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반권위주의, 반자본주의, 급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7년 6월 2일, 퇴역 장군 팔레비의 서베를린 방문을 계기로 APO(외외의회)를 중심으로 한 반대 시위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과도한 진압으로 인해 학생 오네조르크가 사망하면서 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이후 APO는 나치 청산과 공권력에 대한 비판을 거세게 제기했고, 68년 2월에는 직행을 위한 학내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1968년이 되자 서독 학생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에는 프랑크푸르트 부활절 데모가 있었고, 4월에는 두치케라는 학생...
참고 자료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 (정병기. 2016)』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과 반혁명 (정병기. 2007)』
『신좌파의 상상력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1999)』
『19세기 말 프랑스 노동운동에서 성(Gender)과 계급(Class) 사노당(FTSF)의 여성문제를 중심으로 (서이자. 2001)』
『68운동과 프랑스 여성 해방운동 1970년대 전반기 프랑스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이은미. 2006)』
『페미니즘의 재부상, 그 경로와 특징들 (김보명. 2018)』
『6월 민주 항쟁과 인권 (김재민. 2017)』
단행본
이성재, 『68운동』, 책세상, 2009.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장대성 옮김, 『68운동-독일·서유럽·미국』, 들녘, 2006.
논문
이은미, 「68운동과 프랑스 여성 해방운동-1970년대 전반기 프랑스 여성운동을 중심으로」『한국프랑스학논집』 제54집, 한국프랑스학회, 2006.
민유기, 「68년 5월 운동과 프랑스의 대학개혁」, 『프랑스사 연구』 제29호, 한국프랑스사학회, 2013.
손호종, 「68혁명과 학생운동」, 『마르크스 주의 연구』 제5권 2호, 경상대학교 사화과학연구원, 2008.
송충기, 「68운동과 그 역사화」,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