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중세 스콜라 신학
1.1. 스콜라 신학 개요
스콜라 신학은 보통 서구 역사에서 중세라고 명명한 시대의 특징적 신학 사조 또는 신학 방법론을 지칭하는 말로써, 주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주제로 다루었다. '스콜라'는 중세에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던 장소가 수도원의 학교(스콜라)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세 유럽은 9세기를 전후해서 샤를마뉴 대제에 의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경험하면서 중세 최초의 문화적 번성을 이루었고, 학자들을 통한 인문과학이 발전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그 무대가 주로 수도원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11세기경 중세 유럽에 새로운 학분 방법론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통 스콜라주의라고 말한다.
중세 교회가 초대교회에 넘겨받은 것들은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이었고 종교회의와 교부들을 통해서 정리된 신학과 교리였다. 중세의 사람들은 이상의 것들을 통해 자신들에게 종교적 교리나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전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의문을 갖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여 지켜야 할 권위들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내용을 좀더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내는 것이었고, 따라서 스콜라 신학의 목적이나 주제역시 교부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그 내용을 옳은 것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이었으며, 그 방법론 역시 연역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신학의 교리들을 논증하는데 순전히 사유와 추상적 논증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스콜라 신학에서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보편자'에 관한 문제로 이 보편의 문제는 유와 종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그 대상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는 크게 극단적 실재론과 유명론 그리고 온건실재론을 들 수 있다.
1.2. 스콜라 신학의 방법론
중세 교회가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이었고, 종교회의와 교부들을 통해서 정리된 신학과 교리였다. 중세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완벽하게 전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의문을 가지기보다는 권위 있는 것들로 여겨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내용을 더욱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내는 것이었고, 그 방법론 역시 연역적일 수밖에 없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신학의 교리들을 논증하는데 순전히 사유와 추상적 논증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스콜라 신학에서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보편자'에 관한 문제로 이는 유와 종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그 대상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는 크게 극단적 실재론, 유명론, 온건실재론을 들 수 있다. 극단적 실재론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실체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고 원래의 나무 또는 느릅나무의 본체적 실체를 모사하고 있다는 것이고, 유명론은 보편은 말뿐인 추상개념이며, 개별적인 것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온건실재론은 스콜라 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로, 각기의 개별 개체는 자신 속에 그것의 보편자를 갖고 있다는 논지이다.
1.3. 초기 스콜라 신학
1.3.1. 스콜라 신학의 시작
스콜라 신학은 초대교회에서 넘어 온 신앙과 신학의 지식이 유럽인들에게 이해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1세기 이후 교회권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교회는 지상의 모든 권위의 대표자로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자로서의 권위를 가져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현실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의문에 대해 전통적으로 알려진 지식이나 신학이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이러한 현실의 모순들을 찾아내어 해결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같은 방법적 회의가 가장 먼저 나타난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였으며, 투르의 베렝가르는 화체설을 부인하였고, 영국에서 활동했던 로스켈리누스는 극단적 유명론으로 하나님이란 관념상의 실체일 뿐 실제로는 성부, 성자, 성령, 세 실체라고 하였다. 이와 반대로 샴푸의 윌리암은 극단적 실재론을 펴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다양한 주장이 나타났지만 초기 시대에는 실재론이 우세했는데, 보편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곧 최고의 보편개념이라 할 수 있는 '신'의 실재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즉 실재론의 주장이 최고의 보편존재는 신이고 그 외의 모든 것(개체)은 신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정당화하는 데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1.3.2. 초기 스콜라 신학자들
캔터베리의 안셀름(1033-1109)은 스콜라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그는 변증법적으로 합리적이고 확고부동한 진리를 판별해 줄 능력을 가진 이성을 사용해서 교회의 교리들이 맞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신앙에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의 존재론적 논증은 후대에 상상과 실체를 구별하지 못한 논리상의 모순이란 지적을 받기도 하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을 통해 입증해 보이려는 이러한 논증 방식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셀름의 출발점은 이성이 아니라 신앙이었으며, 하나님이 계신 것, 그의 특별한 계시로 사람이 그를 경험하는 것을 전제하고 그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적 체험이 이성을 통해서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스콜라 신학은 바로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인 것을 볼 때 안셀름은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피터 아벨라르(?-1142)는 안셀름이나 다른 인물들이 수도원에서 명상을 통해 어떤 전제를 마련하고 이것을 논증하려 했던 반면에, 파리의 대학에서 치열한 논쟁을 통해 자기의 입장을 정리해 갔다. 그는 신학적 논증에서 신앙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이성만을 통해서 교리나 신학을 논증하려 하였으며, 전통적인 주장을 너무나 날카롭게 비판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호감을 얻지 못했다. 아벨라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신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피터 롬바르두스(1100-60)의 '명제집'은 중세기 신학의 교재였다. 그는 아벨라드의 제자로서 아벨라드가 썼던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모든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아벨라드는 모순 되는 문제만 제시하고 읽는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랐다. 롬바르두스는 전통적 신념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 명제집에는 Ⅰ,Ⅱ,Ⅲ,Ⅳ권이 있었는데, Ⅰ권은 삼위일체론, 신인식론, 신의 섭리 예정론, Ⅱ권은 창조론(천사, 인간, 타락, 은총, 자유의지), Ⅲ권은 화육(그리스도의 인격과 싸움, 믿음 소망 사랑, 악덕과 미덕), Ⅳ권은 성례, 종말론을 다루었다.
1.4. 중기 스콜라 신학
1.4.1. 스콜라 신학의 번성 배경
중세 교회가 초대교회로부터 전해받은 것은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이었고, 종교회의와 교부들을 통해 정리된 신학과 교리였다. 그러나 중세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지식이나 신학이 완벽하게 전해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의문을 갖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여 지켜야 할 권위들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내용을 좀 더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스콜라 신학의 목적과 주제 역시 교부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그 내용을 옳은 것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11세기경 중세 유럽에 새로운 학문 방법론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스콜라주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도원 학교들이 전문 교육 기관이 되었고, 개념이나 이론에 대한 의견 교환과 주장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샤를마뉴 대제의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인해 학자들을 통한 인문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거의 모든 수도원들이 일반 대중의 교육을 담당했고, 교육자들 역시 수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