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 연구
1.1. 서론
한국인에게 있어서 아파트는 이미 일상이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아파트"라고 대답할 것이다. 실제로 주변 친구 3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단 2명만이 아파트 이외의 거주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아파트가 한국인들의 주거형태로 보편화된 상황에서,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녀는 1990년 처음 서울을 방문했을 때, 거대한 규모의 아파트 단지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아파트 현상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녀의 연구 결과는 2007년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간되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9쇄를 기록하며 대중적으로도 폭넓게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발레리 줄레조는 한국 아파트의 역사와 그 현상의 원인, 특징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를 통해 한국의 경제발전과 도시화, 사회문화적 변화상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아파트를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닌 한국사회의 축소판으로 바라보았으며, 아파트 단지의 건설과 확산이 한국 발전 모델의 '압축적 표상'이라고 평가했다. 본 보고서에서는 발레리 줄레조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 아파트의 역사와 특성,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고자 한다.
1.2. 아파트의 역사
1.2.1. 1950년대 서울의 도시경관과 초창기 아파트의 출현
1950년대 서울은 나지막한 스카이라인, 상가와 주거지역의 구분, 대로와 그 뒤편의 보행자 골목으로 대별되는 도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이런 경관은 조선시대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한양의 미로라 불릴 만큼 골목이 빽빽했고 골목과 도시의 대로 사이에 서열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택은 뒷길로 물러나 있고, 대로 주변에는 상점과 같은 3차 산업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형태였다.
당시의 도시 구조 상 한옥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단층에 ㄷ자나 ㄴ자형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서울의 원형적 형태이며, 모든 면에서 서구의 전통적 도시 형태와 대립된다. 서구의 경우 보편적으로 복층구조이며 층이 높을수록 사회 공간의 수직적 차별화가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마당 딸린 한옥이 사라지면서 주거지역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아동, 수유동, 상도동에 표준화 주택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단독주택으로 한옥의 익면을 제거한 장방형의 형태를 보이며 시멘트 사용이 특징이었다. 이 시기 주택은 대부분 단독주택이었으며, 2층이 넘는 연립주택은 소규모로 등장했다.
1958년 종암아파트가 처음으로 건설되었다. 이는 한국 아파트의 선구적 사례로 볼 수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수세식 화장실의 편리함을 역설했을 만큼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모습이었다. 이를 통해 서구식 공동주택의 첫 번째 모델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유입된 아파트 개념이 한국에 도입되었는데, 1920~30년대 일본의 아파트는 내진화성이 높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각 세대의 출입 공간, 수도·전기·가스 시설, 일본식과 서양식 생활양식 선택 공간, 수세식 변소 등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20년대 일본에서 동윤회가 아파트 개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를 열었다.
1.2.2. 1960년대의 도시 정책과 마포아파트의 등장
1962년 도시계획법, 건축법, 1963년 국토건설종합계획법이 마련되었다.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주택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군사 정부는 대기업과 협력하여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을 시작하였다. 특히 1963년 주택건설촉진법이 급조되면서 대규모 사업을 쉽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전국 어디서나 용적률 300% 이상, 5층 이상의 표준화된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는 아파트지구가 형성되었다.
1964년 마포아파트는 642세대 규모로 건설되었는데, 이는 초기 현대식 아파트의 개념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소형 평형(10~15평)에 연탄을 사용하는 서민을 위한 아파트였기 때문에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서울 시민들은 아파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는 아파트 내부에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어 위생적으로 발전했지만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고 평수가 소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 발생하면서 고층 아파트에 대한 불신이 촉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71년 강북 동부이촌동 단지가 건설되었는데, 이 아파트는 강남 개발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3,266세대 규모의 대단지로 공무원과 외국인을 주 입주자로 구성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74년 반포아파트가 등장하며 대단지 아파트 시대를 열었다. 대한주택공사가 건설한 반포아파트는 최소 22평, 최대 64평(복층)의 옵션, 중앙난방 등의 특징을 갖추었고,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되었다.
1.2.3. 1970년대,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등장
1972년 수립된 새로운 도시기본계획(1972년 ~1982년)은 도심 업무 지구 개발, 교통정체 해소를 위한 도로망의 개선 등 굵직한 정책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72년 새롭게 제정된 주택건설촉진법을 통하여 주거단지 개발 절차가 유연해졌고 용적률 300퍼센트와 5층 이상의 주택 건설을 허용하는 도시 내 아파트 지구에 대한 개념이 정립 되었다. 이는 강북의 성장을 억제시키고 강남의 개발 염두에 둔 것이었다.
동부이촌동단지(1971), 반포단지(1974), 잠실 초대형 아파트단지(1977)가 70년대 강남개발을 대표하는데, 모두 한강변에 위치한 것으로 한강변에 새로운 경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발레리 줄레조는 '군대막사'처럼 보인다고 이를 표현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부상하기 시작한다. 한강변의 아파트에서 각종 상품 촬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아파트 값도 차츰 상승하기 시작해, 곧 불어 올 아파트 열풍을 예고한다.
1980년대 들어 규제완화와 부동산 투기로 인해 건설부는 1981년~ 1995년까지 15년간 주택 5백만 세대 건설 계획을 공포하였다. 건설시장과 부동산 시장의 활황기가 찾아온 것이다. 국제규모의 스포츠 제전을 앞두고 도시 미화를 위해 대형 건물과 대규모 주택의 건설이 장려 되었고 강남의 교통망을 확대시키는 지하철 순환선이 테헤란로를 따라 지나면서 잠실과 반포 사이에 제3의 업무지구가 형성되었다. 이에 코엑스 빌딩 등 사무용 건물이 연이어 건설되었고 이 지역의 지가와 부동산 가격은 급상승하였다.
1980년 택지개발촉진법으로 양천구 목동과 노원구 상계동의 신시가지는 수십개의 아파트 단지 내에 각각 10만명 이상의 인구를 수용하는, 수직적이며 기능적인 도시계획 원칙으로 설계되었다. 도시 기능의 엄격한 구별, 상업 지구와 주거지역의 분리, 각 아파트 단지의 독립적 성격을 특징으로 한다. 같은 시기에 서초, 강남, 송파, 강동구에 정부 주도의 대규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