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
1.1. 로고스 기독론
1.1.1. 로고스의 다양한 이해
로고스라는 개념은 다양한 배경에서 이해되어 왔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는 우주에 내재하면서 우주를 다스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신의 이성으로 이해되었다. 유대교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었으며, 창조와 지혜, 계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자기표현으로 나타났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며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매개자로 설명하였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로고스를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고 진리를 가져오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로고스에 구약과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창세기 말씀과 연결하여 로고스가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만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요한은 헬라 세계에 익숙한 로고스 개념을 활용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증거하고자 하였다. 즉, 요한은 로고스라는 개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며 창조와 구속의 주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로고스)은 처음부터 존재하였다. 말씀은 시간과 공간 및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 자체가 곧 하나님이시다.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만물이 말씀으로 인하여 지음을 받았으며, 말씀 없이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되었다. 이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동일한 신적 존재이다. 말씀은 창조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직접 개입하셨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되었다. 그러나 이 빛이 어둠 속에 비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1.1.3.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는 로고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로고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전치사 '프로스'는 '무엇을 향하여'라는 뜻으로 원래 방향 및 관계를 나타낸다. 특히 '프로스' 다음에 인격체가 따라오면 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 구는 로고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로고스 예수님은 하나님의 면전을 향하여 또는 하나님과 관계 가운데 계셨음을 보여준다. 로고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은 분이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었다. 이는 로고스 예수님의 영원함과 선재함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는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말씀이 성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지내면서 내내 긴밀한 교제를 나누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1.1.4.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로고스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다. 여기에서의 하나님(데오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하나님과 달리 정관사가 없다.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과 같은 분이지만, 동일한 분은 아니며,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고 있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1:18에서는 '독생하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고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닌 유일한 하나님인 것이다. 헬라어 구문은 말씀이 신성의 모든 본질 또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곧 메시야 예수가 완정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골 2:9) 성육신한 예수는 여전히 하나님이었으나, 진정한 인간(인성)의 몸을 취했고 신적 속성을 독자적으로 행사하시지 않았다.
1.2. 선재와 성육신
1.2.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로고스가 존재했음을 나타낸다. 즉 로고스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된 '함께'라는 전치사 '프로스'는 방향성과 관계를 나타내는데, 로고스가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존전에 계셨으며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 안에 계셨다.
이처럼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는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는 영원한 존재이자,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는 분이었다. 이는 로고스의 신성과 선재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진술이다.
1.2.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만물이 로고스를 통해 지어졌음을 밝힌다. 여기서 로고스는 창조의 중개자가 아닌 창조의 주체이다. 모든 만물은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하나도 로고스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이는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설명된다.
요한은 로고스의 창조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권능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는 로고스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또한 요한은 로고스의 창조 사역을 현재적인 회복의 창조로 확장시킨다. 타락한 세상에 다시 생명과 빛을 주시는 로고스의 지속적인 역사를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과거에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상실된 본질을 회복시키는 창조의 주체이심을 보여준다.
이처럼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창조주로서의 권능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로고스의 창조 사역이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와 미래까지 지속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구원의 주체이자 생명과 빛의 원천이심을 명확히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1.2.3.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는 아담 창조와 생기 불어넣기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로고스는 흙으로 창조한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신 분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그분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분은 인간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로고스 안에 있는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의 이원론에서 빛과 어둠의 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유무에 따라 나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세상은 어둠에 속하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인격체 안에는 빛과 생명이 있다.
요한은 빛과 생명을 동일시하여,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인간의 빛이라고 강조한다. 그 빛이 어둠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고 이기지 못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다'는 동사는 '이해하다, 깨닫다'와 '압도하다, 이기다'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동사를 사용하여, 어둠이 빛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빛을 이기지도 못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빛으로 오신 로고스가 세상에 계속해서 빛을 발하고 계시지만, 어둠은 그 빛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2.4.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은 빛과 생명을 동일시하여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인간의 빛임을 강조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이기지) 못하였다"는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는 '빛이 어둠에 비치고 있다'이고 다른 문장은 '어둠이 깨닫지(이기지) 못했다'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 문장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 동사를 사용하여 빛이신 로고스가 세상에 계속 비치고 있었지만 뒤에 동사는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동사를 사용하여 단 회적으로 어둠이 빛을 파악하지 못해 믿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깨닫다'로 사용된 헬라어동사는 '카텔라벤'으로 네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이해하다. 깨닫다'라는 뜻이며, 둘째는 '환영하다. 받아들이다. 영접하다, 높이 평가하다'라는 뜻이며, 셋째는' 압도하다, 이기다'라는 뜻이며, 넷째는 '지배하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사용 되는데. '깨닫다 와 움켜잡다'라는 뜻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