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읽는 웨스트민스터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중요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중요성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전 세계의 많은 장로교단에 의해 신앙고백의 표준으로 채택되고 있는데, 신학도인 본인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표준인 문서를 신대원 3년 동안 그 문서의 서론도 읽지 않고 졸업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이번 학기에 개설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연구' 수업을 듣고 있다. 과제도서를 읽으며 신앙고백서를 읽는 새로운 법을 배우고, 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신앙고백서를 읽는 기초가 세워지길 바란다. 저자 존 페스코는 신학도 시절 새롭게 발견한 개혁주의 신앙이 자신을 사로잡았고, 그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성경의 여러 교리를 설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정통장로교회에서 사역을 하며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에 친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문서의 특징인 정교함과 아름다움과 정밀함에도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가 이 문서에 대해 더 신중하고 역사적으로 민감한 연구를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2. 역사적 배경: 근대 초기 종교와 전쟁의 관계
근대 초기 종교와 전쟁의 관계
종교개혁 초창기에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은 초기 형태의 개혁주의 운동을 수용했고, 그로 인하여 스위스의 다른 지역에 종교개혁의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진영과 로마 가톨릭 진영 간의 적대감이 갈수록 높아졌고, 프랑스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많은 교회가 프랑스에 세워졌고, 프랑스 인구의 10퍼센트가 개혁주의 신앙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여황 치하에서 로마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개신교 국가였던 영국 간의 갈등은 혈통관계에 그 뿌리가 있었다. 메리 여왕은 개신교인들을 박해했었고 여왕에게는 스페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이 여왕의 치하에서는 스페인과 영국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 진영은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자신들이 계속 고난을 겪어 왔기 때문에 신학적인 변화를 원했다. 반역죄라는 것이 사제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죄명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신교 진영과 로마 가톨릭 진영이 서로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특히 영국과 스페인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데다가 스페인의 영국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사제들은 충분히 영국의 적국이자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첩자들로 의심받을 수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된 직접적인 배경에도 개혁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심각한 갈등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관여했던 신학자들은 대륙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30년 전쟁으로 인해 국외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결국 내전이 발생했고 엄숙동맹 협약서는 스코틀랜드, 영국, 아일랜드의 세 나라에서 종교의 개혁와 옹호를 촉진시키고 그러한 의무를 서명자들에게 부과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처럼 근대 초기의 종교와 전쟁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1.3. 정치, 신학, 열정이 얽힌 웨스트민스터 총회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소집과 진행 과정을 둘러싼 역사는 아주 복잡하다. 정치, 전쟁, 신학, 열정이 복잡하게 서로 뒤엉킨 가운데서 신앙고백서와 두 개의 교리문답서를 만들어 냈다. 개혁주의 진영과 로마 가톨릭 진영 간의 적대감은 갈수록 높아져 프랑스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많은 교회가 프랑스에 세워졌고, 프랑스 인구의 10퍼센트가 개혁주의 신앙에 충성을 맹세했다. 카트린느 시대로 들어서서는 정치 상황이 불안하져서 개혁주의와 가톨릭 진영 간의 종교적 갈등이 심해져서 여러차례에 걸친 단기간의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여황 치하에서 로마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개신교 국가였던 영국 간의 갈등은 혈통관계에 그 뿌리가 있었다. 메리 여왕은 개신교인들을 박해했었고 여왕에게는 스페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이 여왕의 치하에서는 스페인과 영국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된 직접적인 배경에도 개혁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심각한 갈등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관여했던 신학자들은 대륙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30년 전쟁으로 인해 국외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후에 우리가 장기회의 라고 부르게 된 의회는 주로 개혁주의 신앙을 지닌 개신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회기는 공식적으로 1640년에서 1660년까지였는데, 이 의회에서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기 때문에 찰그 국왕은 영국 전역에 로마 가톨릭의 예배를 강제했던 일을 이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내전이 발생했고 엄숙동맹 협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