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1.1. 잊을 수 없는 6.25의 배경
<잊을 수 없는 6.25의 배경>
정확히 7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적으로 침략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남한의 군사력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신속한 남진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창녕지역은 낙동강 방어선의 중요 거점이었기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과 대치하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지만, 북한군의 공세를 완전히 저지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당시 군사력과 자원 면에서 열세였던 대한민국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겨우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국군과 유엔군의 필사적인 저항과 국민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이 겪은 역사상 가장 큰 시련이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1.2. 창녕지역 6.25전쟁의 경과
정확히 70년 전인 1950년에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였을 때 우리나라는 최전방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대패해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리게 되었다. 낙동강이 서쪽에 흐르고 있던 창녕지역은 북한군과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영산 지역에서 미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4사단과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는데, 이를 창녕전투라고 부른다. 전투기간은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7일까지였다.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 제24사단에게서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제23연대를 창녕 정면, 그리고 제38연대를 현풍 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진지 편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반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2공격집단은 제9사단이 8월 말경부터 제9연대 영산 정면에, 김천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적 제2사단이 창녕 정면에, 적 제10사단이 현풍 정면 낙동강 대안에 집결하여, 8월 31일 오후 10시를 기해 최후 공세를 준비하였다. 8월 31일 적 3개 사단의 기습으로 9월 1일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이 돌파당하여 낙동강 동쪽의 오봉리∼주매리·본초리 선에서 저지하였다. 이후 미 제2사단 작전지역은 창녕과 영산의 2개 지구로 양단되었고, 적 제2·9의 2개 사단과 대치한 상태에서 반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9월 15일 미 제2사단장 케이저는 낙동강 동쪽지역, 곧 오봉리∼본초리 선에서 저항하는 적을 낙동강 서쪽 대안 너머로 격퇴한 다음, 낙동강의 도하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다음 작전을 준비하려 하였다. 9월 16일 새벽, 미 제22연대의 C중대를 적이 기습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제3대대를 주공으로 하여 주진지에서 적을 물리쳤다. 상황이 이처럼 호전되자 미 제2대대는 박진(泊津) 나루터를 통제할 수 있는 전술적 중요 고지인 208고지를 탈환하였다. 이후 적의 퇴각은 다음날까지 계속되어 9월 17일에는 낙동강 동쪽 오봉리∼본초리 일대에서 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의 적 방어진지 돌파작전은 거의 일단락되었다. 창녕교상리 일대에 북한군 제4사단과 전투를 벌인 미군의 공을 기리고자 1959년 3월 31일자로 창녕지구 전투전적비가 세워졌다.
1.3.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6.25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70년 전 발발한 이 전쟁은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 지역이었던 창녕은 이 전쟁의 격전지였다. 창녕의 6.25전적지는 역사적 의미가 크며, 현재에도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이에 창녕 6.25전적지의 역사적 의미와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장소가 지닌 교훈을 살펴보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