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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후기 사회상의 변화와 시조의 향유층 변화
1.1. 조선후기 사회변화의 배경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농업이나 상업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조선 사회에 급격한 생산력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전기까지 잘 유지되던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신분질서에 혼란이 생겼다. 농사법의 발전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부를 축적한 양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그 결과 족보를 거래하여 신분을 사고파는 일들도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왜란과 호란, 거듭된 흉년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나라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이는 돈을 내는 사람의 이름을 빈칸에다 써서 관직을 주는 식이었는데, 그 결과 양반의 수효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양반은 몰락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반의 가치가 떨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양반이 되어야 '사람 취급'을 받고 살 수 있는 사회였고, 그 양반에 가장 가까운 신분이 중인이었다. 이들은 사적인 무역 등의 방식을 통하여, 대다수 사대부를 능가하는 경제력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계층적 동질성이 분명해졌지만 타고난 신분 때문에 여전히 신분 상승의 통로가 막혀있는 현실에 18세기부터 중인 계층의 신분 상승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이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는 문화 예술 차원에서 또한 분출되었다.
1.2. 시조 담당층의 변화: 양반에서 여항인으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중인과 서리 등 양반이 아닌 인구들이 시조의 주된 향유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은 '여항인'으로 불리며, 서울의 도시 공간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여항인은 기존의 양반 신분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사회적 차별을 겪었지만,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시조라는 전통적인 문학 장르를 통해 자신들의 처지와 정서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시조는 애초에 양반층을 위한 문학 양식이었기에, 여항인들이 이를 새롭게 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여항인들은 시조의 형식적 틀은 유지하되, 그 내용과 정서에서는 자신들의 특수성을 반영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여항인 시조에서는 양반 취향의 답습과 상승 욕구가 드러나는가 하면, 현실에 대한 체념과 도피의 모습도 나타났다. 또한 성현을 기리거나 이상적인 상고시대를 동경하는 한편, 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도 시도하였다. 이처럼 여항인 시조는 양면성을 띠며, 기존 질서에 대한 갈등과 새로운 지향을 모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1.3. 여항인 시조의 특징과 한계
여항인이 시조의 새로운 담당층으로 등장하면서 시조 문학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여항인 시조는 양면성을 띠고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던 시조라는 기존 형식에 여항인들이 새롭게 참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첫째, 여항인들은 사대부 취향을 답습하거나 이를 통해 상승 욕구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시조라는 형식 속에 담겨져 왔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려 했기 때문인데, 실제 여항인들의 현실 상황은 여전히 유교적 신분질서 속에 있어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웠다. 즉 그들의 태생적 연원과 시조의 사상적 기반 사이에 이질적인 만남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대부 취향을 모방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둘째, 한편으로 여항인들은 현실에 대한 체념과 도피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은 도학일치의 장소가 아닌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였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사대부의 태도와는 달리, 여항인들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감을 자연에서의 도피와 유락으로 표출하였다. 이처럼 여항인들의 자연 인식은 사대부적 세계관과 거리가 멀었다.
이와 같이 여항인들의 시조 작품에는 상반된 태도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즉 사대부 취향을 모방하려는 모습과 현실에 대한 체념과 도피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시조라는 전통적인 형식 속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려 했으나 실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