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청동기시대와 초기 국가 형성
1.1. 청동기 시대의 경제생활 변화와 군장 등장의 사회적 의미
청동기 시대의 경제생활은 무리 단위의 생활에서 점차 개별 가족 단위의 정착 생활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토지 소유와 축적이 가능해지면서 일부 유력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력자들은 청동기와 같은 위세품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청동기의 출현은 곧 사회 계층화와 권력 구조의 변화를 의미한다. 청동기 제작에는 복잡한 기술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청동기를 소유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들은 점차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군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군장은 일반 구성원과 구별되는 의복과 장신구 등을 착용하고, 무기와 마차 등을 소유하여 자신의 지위를 나타냈다.
이러한 군장 출현은 사회 구조의 위계화와 권력 집중을 의미한다. 군장은 토지와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는 보편적인 사회에서 일부 지배 계층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청동기 시대의 경제생활 변화는 사회 구조의 위계화와 계층화, 그리고 권력 집중이라는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야기한 것이다.
1.2. 삼국 간 관계와 대외 항쟁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일찍이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고 한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강성해졌다. 고구려는 나(那)집단을 통합하고 1세기 후반 태조왕 때 계루부를 중심으로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였다. 고구려는 정복전쟁을 활발히 벌이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5세기 초, 광대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는 삼국 간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고 동북아시아의 강성한 나라로서 중국 남북조 여러 나라와 다각적 외교를 펼치며 발전하였다.
마한 소국 가운데 하나로 시작된 백제는 한반도 중서부의 요지에 자리 잡고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백제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바다 건너 중국의 여러 지역 및 왜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성장에 밀려 수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겨 중흥을 꾀하였다.
신라는 진한 소국 가운데 하나로 여러 집단이 연합하여 나라를 이루었다. 동해안과 낙동강 유역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발전한다. 신라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로 지배층의 권위를 보장하였고 국가의 중대사는 화백을 통하여 결정하였다. 6세기 진흥왕 대에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인 신라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하류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삼국 간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가야는 낙동강 서쪽 지방 소국들로 이루어진 연맹체로서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었으나 삼국의 성장에 밀려 해체되었다. 5세기 후반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을 이루었으나 신라와 백제의 공격을 받으며 축소되다가 대가야마저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대대적 정복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