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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1. 사진의 정의와 역사
사진이란 빛을 이용하여 대상을 기계적으로 기록하는 예술이다. 사진의 역사는 14세기 바늘구멍의 원리를 이용하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카메라 옵스큐라로부터 시작되며, 이를 통해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사물을 좀 더 자세히 그릴 수 있었다. 이후 19세기 말에 에디슨과 폴 등에 의해 유사한 형태의 영화 기술이 발명되면서, 사진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95년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카메라를 발명함으로써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사진과 영화는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1920년대까지 흑백이었던 영화는 1930년대부터 컬러로 바뀌었고, 1950년대 이후에는 와이드 스크린과 서라운드 사운드 등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사진과 영화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발전해 왔다. 사진은 정지된 이미지를 기록하는 반면,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기계에 의해 자동적으로 촬영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진과 영화 모두 현실 세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초기에는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사진과 영화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1.2. 한국 사진의 도입과 발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해병대 종군사진반이 전투현장을 기록한 사진이 최초의 사진이었다. 1872년 오경석은 청나라에서 프랑스 외교관 매휘립이 찍은 자신의 초상사진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초상사진을 남겼다. 또한 역관, 해외시찰 등을 통해서 사진에 대한 개념이 도입되었다.
실질적인 한국사진사는 문헌상 1884년 지운영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서울 마동에서 사진관을 차린 이후부터이다. 1884년 지운영은 고종의 초상사진을 찍었고, 이로써 초상사진 시대가 열렸다.
사진의 본격적인 도입과 기술적인 보급은 1900년대이며, 청일전쟁(1894)이후 일본의 한국진출에 힘입어 일본인들이 사진관을 만들고 영친왕의 서예 스승이었던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1907년 8월 17일 석정동에 '천연당 사진관'을 개관하면서 약 10년 동안 운영하였다. 이때부터 사진관, 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사진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1895년 단발령으로 초상사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1900년대 초 천연당 사진관의 고객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영업사진관과 사진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1907년 7월 13일에는 한국 최초의 사설 미술강습소인 교육서화관이 설립되어 서화가와 사진가들이 사자(寫字), 도화, 사진, 음악을 가르쳤다.
1.3. 사진의 예술성과 기록성
사진은 예술성과 기록성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예술적 표현 수단의 하나로서 작가의 창의성과 주관적 관점을 반영할 수 있다. 사진가는 구도, 조명, 피사체 선택 등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 또한 사진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 매체이다. 사진은 특정 순간을 포착하여 그 순간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통해 사진은 역사적, 문화적 기록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사진의 예술성과 기록성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사진 예술의 발전과 역사 기록에 모두 기여해왔다.
2. 한국 사진의 태동
2.1. 1870년대: 한국 사진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처음 찍은 사진은 1871년에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쳐들어와 통상을 요구한 미국공사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이 자신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들도 많은 풍물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사람이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라 서양인들과 선교사들이 찍어 남긴 사진들이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적인 사진사라고 할 수는 없다.
2.2. 1880년대: 초상사진의 등장
실질적인 한국사진사는 문헌상에 의하면 1884년 지운영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서울 마동에서 사진관을 차린 이후부터이다. 1884년 지운영은 고종의 초상사진을 찍었다. 이로써 초상사진 시대가 열렸다. 고종은 이후에도 자주 사진을 찍었으며 사진을 가장 많이 남긴 국왕이 되었다. 사진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고종을 비롯해 순종, 영친왕, 의친왕, 왕비들, 왕족들의 사진이 이 시기에 많이 남게 되었다. 촬영국은 이후 사진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사진관은 사진 도입 무렵부터 공공성을 띠면서도 영업적인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진관은 서양 문물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갑작스런 근대화에 성난 군중들이 사진관을 파괴하기도 하였고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빨려 들어간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존립의 위기를 가지기도 했다.
2.3. 1900년대: 사진관의 등장과 사진의 대중화
사진관은 사진 도입 무렵부터 공공성을 띠면서도 영업적인 형태로 정착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진관은 서양 문물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근대화에 성난 군중들이 사진관을 파괴하기도 했고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빨려 들어간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존립의 위기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1895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자신의 전통적 모습을 남기려는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사진은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신문화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이후 사진관은 1940년대까지 사진 문화 발전을 담당했고 초상사진에서부터 결혼, 약혼, 환갑, 돌 등 기념사진, 일상의 기록과 풍경사진의 모든 작업을 하기도 했다. 초기 사진관 시대의 초상사진이 대중들에게 자연스런 문화가 되면서 사진의 기능과 범주는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몇몇 선구적인 사진가들에 의해 예술사진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모델이나 배우가 따로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기생은 대중에게 초상을 공개하는 최초의 여성들이었고 기생사진으로 만든 엽서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수집해가는 관광엽서로 활용되었다.
3. 한국 사진의 발전과 역사적 변화
3.1. 1910년대: YMCA와 사진교육의 시작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창립되었으며, 이에 사진 속성과를 개설하였다. 초대교사는 최창근이었는데, 그는 이주노동자로 하와이 사진관을 운영하다가 1909년 8월 11일 귀국하였다. 최창근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학 저서인 "자택독습최신사진술"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1910년 YMCA 내에 목공과, 철공과, 사진과를 신설하였고, 사진속성대모집 광고를 1910년 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