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과학기술사 족보"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과 김정호
1.1. 장영실의 과학 이야기
1.1.1. 어머니를 따라 노비가 된 장영실
1.1.2. 조선제일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1.1.3.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했던 세종대왕
1.1.4. 조선후기 과학자 장영실
1.1.5. 세종과 장영실이 만든 발명품들
1.2. 김정호의 과학 이야기
1.2.1. 가난한 평민출신 김정호
1.2.2. 지도제작에 평생을 바치다
1.2.3. 김정호를 도와준 벗 최한기
1.2.4. 지도를 남기고 사라진 김정호
1.2.5.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
2. 서지학의 필요성
2.1.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 방문기
2.2. 서지학이 필요한 이유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과 김정호
1.1. 장영실의 과학 이야기
1.1.1. 어머니를 따라 노비가 된 장영실
장영실은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즉, 장영실의 아버지는 귀화한 중국인이었고 어머니는 노비였기 때문에, 장영실 또한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야 했다. 이처럼 천민 출신이었지만 장영실은 어렸을 때부터 과학적 재능이 뛰어나 기술자로 활약했다. 이후 조선 세종 임금의 눈에 띄어 관직에 오르고 발명가이자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처럼 장영실은 낮은 신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아 출세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1.2. 조선제일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장영실은 태종 때 축성, 농기구와 무기 수리 기술을 인정받아 궁중 기술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세종의 눈에 띄어 발명가이자 과학자로 거듭났다. 장영실이 만든 과학 기구로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 측우기'가 있다. 측우기는 농사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434년에는 물이 흐르는 원리를 이용해 시각을 자동으로 알려 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어 소리가 나면 북이나 종을 쳐서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렸다. 장영실이 만든 금속활자 갑인자'는 기존의 활자에 비해 글자크기가 고르고 조립식이어서 한 번에 여러 장을 찍어 낼 수 있어 인쇄술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천문시계 '혼천의', 해시계 '앙부일구' 등 수많은 과학기구를 만들었다.
1.1.3.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했던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장영실에게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종대왕은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장영실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장영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자격루 제작에 성공했을 때는 정4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장영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신분보다는 능력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1.1.4. 조선후기 과학자 장영실
현재 장영실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에 따르면 장영실은 1442년 임금의 가마 제작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을 때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로 곤장 80대를 맞고 파면되어 궁궁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장영실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한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세종의 명으로 제작한 기구들은 백성들의 삶을 더 편리하게 했고, 나라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오늘날에는 신기술 제...
참고 자료
로버트 단턴, 2011, 『책의 미래』, 교보문고
노경희, 2022, 「고문헌 자료의 형태서지학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