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정조의 수원화성, 화성행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건축학 전공생이 바라본 정조의 수원화성
1.1. 정조는 누구인가?
1.2. 정약용은 누구인가?
1.3. 정조는 왜 수원화성을 건설했을까?
1.4. 수원화성 답사기
1.5. 화성행궁 답사기
1.6. 수원화성박물관 관람기
1.7. 수원박물관 관람기
2. 정조와 정약용의 꿈이 구현된 화성
2.1. 수원박물관에서 느낀 정조의 효심(孝心)
2.2. 정치적 측면에서 본 수원 화성
2.3. 정조가 사랑한 화성의 자연, 화성 16경
2.4. 수원화성
2.5. 화성행궁
2.6. 정조는 수원으로 천도하려고 했을까?
2.7. 정조의 뜻이 투영된 결과물, 수원 화성
2.8. 참고자료 및 참고문헌
3. 수원 화성(華城) 답사기
3.1. 답사를 시작하면서
3.2. 만안교
3.3. 수원 화성 연무대와 그 위에서 바라본 공심돈
3.3.1. 창룡문
3.3.2. 방화수류정과 북암문
3.3.3. 화홍문
3.4. 수원화성박물관과 화성행궁
3.4.1. 수원화성박물관
3.4.2. 화성행궁: 신풍루 - 좌익문 - 중앙문과 봉수당
3.5. 건릉
3.6.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건축학 전공생이 바라본 정조의 수원화성
1.1. 정조는 누구인가?
정조는 조선왕조 22대(1752~1800) 임금이었다.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는 선황제(宣皇帝)로, 영조의 아들인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년)에 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어받았다. 대리청정을 하던 1775년 바로 다음 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의 즉위 당시 조선의 사회는 변화의 과정을 맞고 있었는데, 농업 중심의 경제가 상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굳건했던 신분제 역시 약화되고 있었다. 정조는 이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개혁 정책을 구상하고 추진하고자 했다.
그는 하층민들의 불평등 소외 정책을 개선하고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책을 펼쳤다. 기득권 세력의 특권을 분산시키려 노력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대동사회론을 받아들이며 신분 및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양반 사대부 중심 사회가 아닌 백성 중심 사회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근대적 의식이 정조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정조는 백성의 재산을 늘리고, 인재를 양성하며, 군사제도를 개편하여 국가 전체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4대 국가 개혁 방침은 민산 정책, 인재 양성, 군제 개혁, 왕실 재정 개혁이었다. 이를 통해 정조의 애민정신과 자생적인 근대화를 위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1.2. 정약용은 누구인가?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실학자로, 1762년 정재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으며 부친의 생활 관리를 보고 자라, 경제적인 약자들을 어떤 식으로 돌보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22세에 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정약용 하면 필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토지 개혁이다. 지난 1학기 전공과목인 토지이용계획론을 수강하며 정약용의 토지 개혁을 학습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토지의 과도한 독점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때문에 정약용은 토지를 개개인이 소유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공동 농장을 만들어 함께 농사를 짓고, 얻은 것은 일한 만큼 나눠 갖도록 하였다. 그는 토지개혁을 통해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는 자를 일치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실학 또한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다. 정약용은 서구의 실용적인 기계문명을 받아들여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이 실학정신은 자연스럽게 화성 건축에 투여되었다. 기기도설을 활용해 거중기를 제작하였고 이를 통해 건축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화성의 여러 시설물들 역시 실학적 기풍 속에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수원화성이 오늘날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그에게서 개혁을 향한 강한 의지와 함께 과감한 도전 정신이 확연히 드러난다."
1.3. 정조는 왜 수원화성을 건설했을까?
정조는 수원화성을 건설한 이유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반대 세력의 위협 속에 휩싸였다. 사도세자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죄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이를 극복함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1789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뒷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개칭하였다. 이는 실제 사도세자가 직접 찾아가 감탄한 장소였고, 바로 그곳에 아버지의 새 무덤을 조성함으로써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실추된 왕권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둘째, 국방 개혁의 중심지로 육성시키기 위해서이다. 수원은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어 군사상 요지라고 생각하였다. 이곳을 잘 조성한다면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적절한 지역이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또한 교통적 입지와 배후지인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수원을 군사적 주요 거점지역으로 성장시키고, 경제적 안정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자신의 친위부대를 이곳에 주둔시키기 위해 장용영 향군 5초를 설치하였다.
셋째, 상업과 농업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이다. 군사력 향상과 함께 신도시를 건설하여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업 행위를 하고 이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고자 한 것이다. 정조의 의중을 안 신하들은 여러 제안들을 내놓았고, 정조는 이를 일부 받아들이기로 한다. 상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독점권 없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함으로써 조선 경제의 혁신이 이루어졌고, 상업이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즉, 정조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여 구세력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양과는 별도의 공간에서 신진 세력들을 중심으로 개혁 정치를 펼치려 했던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변화된 조선의 모습을 꿈꾼 것이다.
1.4. 수원화성 답사기
수원화성 답사기는 조선 후기 개혁군주 정조와 실학자 정약용의 꿈이 담긴 공간이다. 필자는 먼저 만안교에서 정조의 효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안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때 건설한 돌다리로, 정조의 효심이 깃든 곳이다. 이어서 수원 화성 연무대에서 성곽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는데,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무대 위에서 공심돈을 바라보며 당시 화성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이어서 화성의 성문인 창룡문을 방문했다. 창룡문은 옹성구조를 취하고 있어 기존에 보아왔던 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지혜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방화수류정과 북암문을 거치며 화성의 천혜의 자연환경과 함께 정조의 애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방화수류정은 정조가 직접 시를 남긴 곳으로, 화성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보여준다.
이어서 화홍문을 방문했다. 화홍문은 수원천 위에 세워져 있는 수문으로, 홍예문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다음으로 수원화성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에서는 화성 축성 과정과 화성행차 등 화성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정조와 정약용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정조의 화성행렬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 병풍 그림이 인상 깊었다.
이어서 화성행궁을 둘러보았다. 화성행궁은 신풍루, 좌익문, 중앙문으로 이루어진 3중 구조로, 정교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마련한 행사 장소였던 봉수당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공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건릉을 방문했다. 건릉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조성한 능으로, 정조의 그리움과 효심이 깃든 곳이다.
이번 답사를 통해 필자는 정조와 정약용이 꿈꾸던 새로운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성이라는 공간에 투영된 정조와 정약용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1.5. 화성행궁 답사기
화성행궁은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건릉을 참배하기 위해 만든 행궁이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효심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화성행궁은 신풍루, 좌익문, 중앙문 등 3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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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 조선의 가장 뛰어난 건축물 (위대한 문화유산, 최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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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식, 김정현, & 이동욱. (2004). 역사적 토목 구조물 수원 화성. 대한토목학회지, 52(9), 97-101.
임창완. (2017). 사도세자의 추숭 전례와 정조의 의리론. 연세대학교 대학원, 8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 조선을 개혁하려한 실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