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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사진의 역사
1.1. 사진의 국내 유입
중국과 일본에 전래된 사진은 우리나라에 오면 국내 사정으로 인해 수용의 길이 막혔다. 1840년대 당시 조선은 폐쇄정책을 실시해 외국과의 교섭을 차단하고 천주교를 박해했으며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기술의 유입을 금지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주변 국가에 있던 사진이 국내로 이입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였다. 계속되는 서양 자본주의 세력의 통상과 개항 요구는 프랑스와 미국의 전쟁 형태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졌고 이후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기까지 우리나라는 쇄국으로 인한 암흑기가 장기화되었으나 중국과의 문호는 개방되어 있었다. 매년 공식 사절단이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서양 문물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진 또한 사절단과 역관의 관심으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카메라를 포함한 촬영 기재를 구입해야 하고 기술을 익히는 데 어려움이 있어 수용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중국과 일본에 이미 전파된 사진술은 사절단에 의해 정보 형태로만 이입되는 특이한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또한 1880년대 초반 개화파 지식인들 사이에 서서히 확산된 호기심으로부터 사진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2. 중국을 통한 사진과의 접촉
중국을 통한 사진과의 접촉은 1860년대 쇄국시대에 유일하게 교류하던 나라가 중국의 청나라 뿐이였던 점에서 기인한다. 매년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1863년 이의익을 정사로 하는 '진하 겸 동지사은사'라는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로 사진관을 찾은 사람들이며, 외국인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이의익의 여행기이자 보고서인 '연행초록'에 따르면, 당시 촬영장의 구조는 오전 8시반~11시에만 가능하고 맑은날에만 촬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의 카메라는 캡 셔터를 사용하는 습식 감광판 사용 카메라 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의익이 러시아 사진관에 가서 했던 촬영이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촬영이었고, 포토그라피를 '사진'이란 용어로 처음 부른 것도 이들이 처음이었다. 사진이란 용어가 일본에서 전래된 것으로 생각해 왔던 막연한 판단이 이로 볼 때 잘못된 것이며, 사진이란 용어가 1863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모진 또는 모진지법'이라고 불리다가 다음날 사진을 처음 찍을 때부터 '사진'이라고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99년 '최인진' 전 한국사진사연구소장이 쓴 '한국사진사'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이후 1872년 오경석이 중국 베이징에서 프랑스 외교관 매휘립이 찍은 자신의 초상사진을 가지고 귀국해 우리나라 최초의 초상사진을 남기며, 역관, 해외시찰 등을 통해서도 사진에 대한 개념이 도입되었다.
1.3. 고종 황제의 초상사진에 관한 고찰
19세기 말에 외세의 침략적 진출이 시작되면서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었던 조선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왕조는 더 유교적인 가치관만으로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동요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가치관과 구습을 유지한 채 국가를 통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통치권을 지닌 조선의 마지막 왕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개혁의 주체로서 조선을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던 임금이었다. 신문물인 사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했던 구한말의 조선 사회에서 고종은 오히려 사진 촬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현재 잔존하고 있는 많은 분량의 고종의 사진이 증명해 주고 있다.
1880년대 초에 외국인들에 의하여 촬영되었던 고종의 사진에서 고종은 경직되어 있으나 다소 편안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그 자신이 황제에 등극한 이후 촬영에 임했던 사진의 대부분은 신식 군복 차림에 경직된 포즈로 일관되어 있다. 이 당시 촬영되었던 사진은 의궤도감에서 보이는 초상화와는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의궤도감에 기록되어 있는 초상화는 기존의 초상화와 유사한 의도, 즉 진전에의 봉안하기 위한 의도로 제작된 것이며, 이는 기왕의 제례적 기념적인 성격을 띠고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고종의 초상사진은 대중들에게 지배자의 통치를 목적으로 한 유포는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일제의 간섭을 받고 있었던 구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함께 외세의 대항의식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었다.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무력항쟁과 더불어 항일의식이 고취되었던 상황에 고종 황제의 사진을 게시하자는 '어진봉안운동'도 각 단체별로 파급되었다. 하지만 이미 다수의 대중들에게 고종의 초상사진이 알려져 있었으며, 일반인들의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종의 재세 당시 또는 살아 생전에 촬영되어야 한다는 매체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사진이 초상화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면서도 초상화와는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에 의해 창간된 [그리스도 신문]은 고종의 사진을 석판으로 인쇄, 발행하여 어진을 신문 구독률 증가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인쇄하여 발행된 고종의 사진이 어떠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출판물에 이용되어 배부되기 시작한 고종의 사진으로 인하여 이미 왕은 일반인들에게 그 시각적 이미지를 가시화하게 되었으며, 수지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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