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
1.1. 개경의 성립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은 918년 고려가 건국되면서 수도로 선정되었다. 개경은 고구려 시대부터 송악군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신라 후기까지만 해도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처음으로 송악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후에 궁예가 905년 송악군을 수도로 정하면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고려가 건국된 후 개경은 본격적으로 수도로 선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개경은 북한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방어에 유리했고,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서 대외 교역에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정치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왕건은 통일 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수도를 이전하여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다. 개경은 이미 신라와 후백제의 통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로 적합했다.
이처럼 개경은 고려의 중요한 수도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고려 왕조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1.2. 개경의 발전
1.2.1. 고려 건국 초기
고려는 918년에 태조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다. 당시 왕건은 수도를 정해야 했는데,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개성이었다. 개성은 본래 신라 후기까지만 해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성은 고구려 시절부터 송악군으로 불리며 중요한 지역이었고, 왕건의 6대조인 호경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왔다.
고려가 건국된 후 개성은 수도로서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개성이 수도로 선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적으로 북쪽의 산악지대와 남쪽의 평야가 펼쳐져 있어 방어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서 대외 교역에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셋째, 이미 신라와 후백제의 통치 중심지로서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로서 적합했다. 넷째, 왕건은 통일 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는데, 새로운 수도의 선정은 이러한 정치적 필요성을 충족시켰다.
이렇게 고려 건국 초기에 개성이 수도로 선정되면서 이곳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정치적 중심지로서 개경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국가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초기 발전의 토대 위에서 고려는 더욱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2.2. 광종 시기
광종(949-975) 시기 황도 개칭 (960년)
광종은 960년에 개경을 '황도(皇都)'로 바꾸어 수도의 위상을 높였다.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광종은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중에서도 개경의 황도 개칭은 매우 중요한 조치였다.
광종은 전제왕권 체제 확립을 위해 세금 제도 개혁, 과거제 실시, 불교 억압과 유교 진흥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개경을 황도로 선포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경을 '황도'라 칭함으로써 고려의 수도로서의 위상을 한층 높였고,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황제가 거하는 도읍을 의미하는 '황도'라는 칭호는 국가 간 서열과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광종은 이를 통해 고려 왕실의 정통성과 위엄을 과시하고자 했다. 또한 황도 개칭을 계기로 그동안 지방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던 호족들을 더욱 통제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광종 시기 개경의 황도 개칭은 고려 왕실의 위상과 중앙집권 체제 확립을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이를 통해 개경은 고려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더욱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1.2.3. 성종 시기
고려의 수도 개경은 성종(981-997)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성종은 유교를 국교로 삼고 유교적 관료 체계를 확립하여 국가 운영의 기반을 다졌다.
성종은 먼저 유교 중심의 국가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는 성균관을 설립하여 유교적 교육 체계를 구축하고, 관료들을 유교적 규범에 따라 선발하고 교육했다. 이를 통해 고려 국가 운영이 유교 윤리와 제도에 기반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 시기에는 개경 내에 여러 관청과 교육 시설이 확충되었다. 이로써 개경은 정치, 행정,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개경에는 국가 기관들과 더불어 성균관, 국자감 등 교육 기관들이 들어섰고, 이를 통해 유교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처럼 성종은 유교 중심의 국가 체제와 인재 양성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개경을 고려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으로 발전시켰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