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사진사와미학 2"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 사진의 역사
1.1. 한국 사진의 기원
1.1.1. 최초의 사진 기록
1.1.2. 사진의 수용과 정착
1.2. 사진의 도입과 발달
1.2.1. 영업사진의 시작
1.2.2. 예술사진의 태동
1.3. 일제 강점기 사진의 변화
1.3.1. 사진 공모전의 영향
1.3.2. 예술사진의 발전
1.4. 광복 이후 사진계의 변화
1.4.1. 전국적 사진 단체의 등장
1.4.2. 리얼리즘 사진의 부각
1.5. 6·25 전쟁과 사진
1.5.1. 종군사진가의 역할
1.5.2. 전쟁 기록과 상징
1.6. 1960년대 이후 사진의 변화
1.6.1. 사진의 사회적 위상 강화
1.6.2. 전문 사진 분야의 발달
1.7. 1980년대 이후의 사진
1.7.1. 디지털 사진의 등장
1.7.2. 새로운 경향의 사진 작품
1.8. 2000년대 이후 현대 사진
1.8.1. 매체의 변화와 사진의 발전
1.8.2. 사진의 다양한 활용과 융합
2.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한국 사진의 역사
1.1. 한국 사진의 기원
1.1.1. 최초의 사진 기록
한국에서 최초로 사진이 촬영된 것은 1863년 조선 연행사 일행이 북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 공사관 사진관에서 여섯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2008년 새로이 발견된 사진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전에는 1997년 발견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선 갑판에서 촬영된 세 장의 조선인 사진이 한국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863년 연행사 일행의 사진이 새로 발견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이들 사진이 한국 최초의 사진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 최초의 사진 기록은 외국인에 의해 촬영된 것으로, 역사적 사건이나 종교적 기록과 관련된 사진들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이 취했던 쇄국 정책과 서양 문물에 대한 배타적 자세 때문에 개인이 소지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1.1.2. 사진의 수용과 정착
사진의 수용과 정착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외국과의 통상과정에서 사진이 전래되거나 서양 제국주의의 강제 통상조약에 의해 사진이 들어오지 않고 예견치 않은 사건으로부터 이루어졌다.
한국에 사진이 처음 들어온 것은 문헌상으로 1863년 조선 연행사 일행이 북경에 갔을 때 당시 러시아 공사관 사진관에서 촬영된 여섯 장의 사진이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1863년 연행사 일행의 사진들이 오늘날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사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국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선 갑판에서 촬영된 세 장의 조선인 사진이다.
한국에 사진이 처음 들어온 시기가 중국보다 약 20년 늦었던 이유는 중국 아편전쟁 이후 조선이 지향한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로 인한 서양 문물에 대한 배타적 정책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서양 문물을 대표하는 사진은 개인이 소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될 정도로 당시 조선에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에 사진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서양 문물 수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했지만, 1880년대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조선 사람이 해외에 유학하여 사진술을 익히고 촬영국을 세우는 등 주체적으로 사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특히 1884년 지운영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서울 마동에 사진관을 차리면서 본격적인 사진의 정착이 이루어졌다.
이후 1900년대에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 진출에 힘입어 일본인들의 사진관이 여러 곳에 생기면서 사진의 기술적인 보급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강 김규진이 1907년 석정동에 사진관 '천연당'을 개관하면서 본격적인 영업사진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촬영국"으로 불리던 사진관이 정식으로 "사진관"이라고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요컨대, 한국에 사진이 전래되고 정착되는 과정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다. 개항기 이전까지는 서양 문물에 대한 배타적 정책으로 인해 사진 수용이 지연되었지만, 1880년대 이후부터는 조선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사진을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인 정착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를 통해 영업사진을 중심으로 한국 사진이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2. 사진의 도입과 발달
1.2.1. 영업사진의 시작
사진의 본격적인 도입과 기술적인 보급은 1900년대이며 청일전쟁(1894)이후 일본의 한국진출에 힘입어 일본인들이 사진관을 만들고 영업사진의 시대가 열렸다. 일본인들이 각지에 사진관을 차리게 되면서 한국에서 영업사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들로부터 사진을 배운 한국인들이 독립해서 사진관을 내게 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사진관의 수가 차츰 늘어갔다. 1895년 단발령으로 초상사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1900년대 초 천연당 사진관의 고객은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영업사진관과 사진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1907년 8월 17일 석정동에 '천연당 사진관'을 개관하여 약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이때부터 사진관, 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사진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이처럼 1900년대에는 영업사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한국 사진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2.2. 예술사진의 태동
1920년대부터 국내에 전국적으로 사진학원이 세워지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하면서 한국에서도 예술사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1920-30년대 근대적인 사진 교육을 받기 위해 서순삼, 신락균, 현일형, 진두성, 박송우 등 조선 유학생들의 사진 유학은 한국 근대 사진 교육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중 신락균은 『사진학개설』을 저술하며 사진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였고, 예술사진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사진의 풍부한 가능성을 찾아나가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이 시기 동광 사진학원(1929년 3월), 남성 사진전습학원(1920년대 후반), 무궁화 여학교 사진부(1926년) 등의 사진학원들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사진 교육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사진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예술사진 유행의 발단이 되었다.
1920년대의 예술사진 운동은 경성 사진사협회가 주도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기, 초기에는 전람회보다는 단체가 주최하는 공모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사회적, 대중적으로 기반이 잡히지 않은 사진은 전람회의 형태로 대중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였다. 공모전 입상은 사회문화적으로 인정받는 길이었고,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때, 신문사는 공모전의 개최를 알리고 입상 발표를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문사는 192...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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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석, < 다시 쓴 한국 사진사 >,한국 사진사, 문학동네, 2021, 365~3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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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 < 한국 사진사 >, 형설출판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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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한국전쟁기 한국사진가의 사진사적 위상」,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27집, 2010년, p435~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