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려 무신정권의 붕괴과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고려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1.1. 무신정권의 성립과 최씨 이전의 무신정권
1.1.1. 무신정권의 성립배경과 의종 24년 보현원 참변
1.1.2.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집권과 무신정권의 변화
1.2. 최씨 무신정권
1.2.1. 최충헌 정권의 성립과 강화
1.2.2. 최이, 최항, 최의 정권의 변천과 특징
1.3. 무신정권의 붕괴
1.3.1. 몽골과의 관계 악화와 무신정권 말기의 동요
1.3.2. 최씨 정권 몰락 이후 김준, 임연 정권의 약 12년 지속
1.3.3. 왕정복고와 무신정권의 최종 종말
2.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변화
2.1. 도방, 교정도감, 정방 등 새로운 기구의 등장과 발전
2.2. 전통 기구인 중서문하성과 평장사의 변화
2.3. 기구 운영을 통해 본 무신정권의 성격 변화
3. 무신정권 시기 사회구조의 변동
3.1. 전시과 제도의 붕괴와 대농장의 등장
3.2. 무신정권 초기 민란의 성격과 전개
3.3. 무신정권 시기 신분제 변화와 사회적 동요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고려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1.1. 무신정권의 성립과 최씨 이전의 무신정권
1.1.1. 무신정권의 성립배경과 의종 24년 보현원 참변
무신정권의 성립배경과 의종 24년 보현원 참변은 다음과 같다.
고려 전기 과거제 도입과 능력중심 인재등용, 지방호족 세력약화, 문벌귀족 중심 정치구조 성립은 문신에 대한 무신들의 열등감을 고조시켰다. 이에 무신들에 대한 차별이 점차 심해지자 무신들이 일어나기에 이르렀고, 그로 인해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의종 24년(1170) 보현원 행차 중 문신 한뢰가 무신 이소응의 뺨을 때린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에 분노한 무신들은 난을 일으켰고,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했다. 이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를 끌어들이면서 난을 계획했다가 한뢰의 사건을 계기로 성공했다.
무신란으로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했고, 조정은 무신들에게 장악되었다. 이와 달리 농민들의 반란과는 달리 무신정권은 문신중심 정치체제 타도와 무신중심 체제로의 변혁을 꾀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1.2.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집권과 무신정권의 변화
의종 24년(1170) 보현원 참변 이후 무신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하면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약 26년간 무신정권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시기에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이 차례로 집권하였다.
먼저 이의방은 이고, 채원 등과 함께 무신란을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의방은 낮은 지위에 있었던 무신들이었기 때문에 중방의 권한을 강화하고 하위 무신들에게도 벼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을 겪으면서 결국 정중부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정중부는 고위 무신이었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를 꺼렸다. 따라서 동반 권무관직 임명 등을 요구한 하위 무신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이러한 정중부의 온건한 태도에 불만을 품은 하위 무신들의 반발로 정중부는 1175년 물러났고, 1179년 경대승에 의해 제거되었다.
경대승은 무신란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가문의 힘으로 출세한 인물이었다. 경대승은 문신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로, 특히 의종 살해자인 이의민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또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사병 조직인 도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불안감에 시달리다 병사하였다.
이의민은 앞서의 집권자들과 달리 무신란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의민은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집권에 성공하면서 하급 무신들의 신분 제약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의민 정권 때는 문벌이나 학식보다 개인의 능력이 중요해졌고, 문신들이 임명되었던 일부 기관에 무신들의 겸직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무신정권 초기 약 26년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이 차례로 집권하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저마다의 성향에 따라 정권을 운영하였고, 이 과정에서 문신에 대한 차별과 하위 무신들의 불만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의민 정권이 최충헌에 의해 무너지면서 최씨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1.2. 최씨 무신정권
1.2.1. 최충헌 정권의 성립과 강화
명종 26년(1196)에 최충헌을 중심으로 이의민 정권을 몰아내면서 고려의 무신정권은 큰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최충헌 이후 4대 60년간 유지되면서 최씨 무신정권의 개막을 알리게 되는데, 최충헌의 후손들인 최이(崔怡), 최항(崔沆), 최의(崔?)의 시기는 최충헌이 다진 기반 위에서 정권을 장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최충헌은 처음 이름이 최란(崔鸞)으로 우봉(牛峯: 현재의 황해북도 금천군 우봉)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인 최원호(崔元浩)가 상장군을 지냈기 때문에 최충헌은 음서로 양온령(良?令)이 되었다. 최충헌은 성격이 호전적이고 용감하였으며, 그의 동생 최충수(崔忠粹)도 역시 사나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명종 4년에 원수 기탁성이 조위총(趙位寵)을 치면서 최충헌이 용감하다는 소문을 듣고 별초도령(別抄都令)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당시 세운 전공으로 거듭 승진하여 섭장군(攝將軍)이 되었다. 하지만 이의민 정권 당시 최충헌의 출세는 억제되었으며, 섭장군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최충헌은 이의민 정권에 불만이 많았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명종 26년, 왕이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하는 동안 최충헌은 이의민을 기다리다 목을 베었다. 이로써 이의민 세력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먼저 정변을 함께 일으켰던 동료들 중에서도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은 이들을 제거하였다. 최충수와 박진재가 그 희생자들이었는데, 특히 최충수는 최충헌 못지않게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최충헌과 최충수는 명종을 폐하고 신종(神宗)을 옹립하였다.
최충헌은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사원세력을 억압하였다. 승려들, 특히 국왕의 서자(庶子)로서 승려가 된 소군(小君)들을 궁성으로부터 축출하고, 무력으로 승병들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태도로 대응하였다.
최충헌은 스스로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사병조직인 도방(都房)을 조직하여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였다. 도방은 사사(死士), 도적, 금군(禁軍) 등을 구성원으로 삼아 사병으로 기능하였다.
이렇게 최충헌은 다져진 기반 위에서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였고, 후에 최이, 최항, 최의까지 4대에 걸쳐 62년간 최씨의 무신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2.2. 최이, 최항, 최의 정권의 변천과 특징
최이(崔怡:최우)는 고종 6년(1219) 최충헌의 집권 23년 만에 권력을 이어받았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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