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상세정보

소개글

"논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논산 지역 문화유산
1.1. 강경 미내다리와 논산 원목다리
1.2. 계백묘
1.3. 견훤묘
1.4. 개태사
1.5. 논산 쌍계사
1.6. 관촉사
1.7. 돈암서원

2. 고택과 인물
2.1. 논산 명재 윤증고택
2.2. 산청 남명 조식의 산천재

3. 마을의 역사와 민속
3.1. 노성면 가곡리
3.2. 상월면 월오리

본문내용

1. 논산 지역 문화유산
1.1. 강경 미내다리와 논산 원목다리

강경 미내다리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돌다리이다. 길이 30m, 너비 2.8m, 높이 4.5m의 크기로, 3개의 홍예(무지개 모양)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하천을 미하(渼河)라고 부른 데서 다리 이름을 미내다리[渼奈橋]라고 하였다. 1731년(영조 7년)에 강경촌에 살던 석설산 송만운 등이 주도하여 황산의 유승업, 설우, 청원 등과 함께 공사를 시작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완성하였다. 이 다리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조선시대에 국가 사신이나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한편 논산 원목다리는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돌다리이다. 길이 16m, 폭 2.4m, 높이 2.8m의 크기로, 홍예석교(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의 형태를 띤다. 이 다리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광무 4년(1900)에 홍수로 파괴되었다가 승려와 민간인이 공사비를 모아 재가설하였다.

이처럼 강경 미내다리와 논산 원목다리는 조선시대 지방 교통과 지방민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를 통해 당시의 건축기술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1.2. 계백묘

계백묘는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왔을 때, 죽음을 각오한 5,00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과 황산벌에서 싸웠던 계백 장군의 유허지로,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계백 장군은 백제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전쟁이 끝난 후 김유신은 계백의 시체를 찾도록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백제의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히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후 백제의 유민들과 묘소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왔다.

계백묘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 수락산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966년 묘를 발견했을 당시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어 있었는데, 부적면 주민들이 지석을 안치하고 내광회벽을 완봉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봉분 둘레는 47.6m, 지름 15.15m, 높이 6.5m 규모이다. 비석에는 '전백제계백장군지묘(傳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씌어 있다.

계백은 백제가 마지막으로 치열하게 저항했던 역사적 인물이자, 의병과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받는다. 그의 투혼과 충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계백묘는 그러한 계백 장군의 숭고한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소중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1.3. 견훤묘

견훤(甄萱,867~936)은 백제 땅에서 배출한 마지막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웅의 일생담에 어울리는 가지가지 에피소드로 장식된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대적하였으므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기록과 평가는 편파에 가까워서, 균형감을 가지고 한 영웅의 일생에 인간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용맹 하나로 혼란스러운 세태를 헤쳐 간 그의 개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줄까.

견훤은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살아 있는 백제의 마지막 영웅이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견훤은 후백제를 세워 신라에 대항하였지만, 뜻밖에 그의 평생 라이벌은 신라가 아닌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 왕건 또한 고구려를 이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나선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에게 모두 이미 지는 나라와의 대결은 의미가 없었다.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견훤이었다. 892년, 신라 진성여왕 6년 되는 해, 견훤은 몰래 무리를 불러 모았다. 그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이 호응해, 한 달 사이에 군사가 5천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광주에서 스스로 왕으로 나섰다.

고려를 세운 왕건과의 싸움은 920년 대야성 공격을 시작으로 정점에 이른다. 견훤은 927년 경주 공격에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내세웠고 왕건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932년 부하 공직이 왕건에게 항복하며 기세가 꺾였다. 이후 견훤의 아들 신검이 모반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고 마침내 935년 3월 견훤은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나 6월 견훤은 성공적으로 도망쳤고 마침내 라이벌 왕건을 찾아갔다. 지난날의 적에게 의탁하여 이윽고 제 아들을 적이라 부르는 신세가 된 견훤의 생애는 비참한 최후였다.

견훤의 묘는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번지 정상에 자리한다. 이 산 전체를 마을에서는 견훤이 무덤, 또는 왕묘라고도 부르고 있다.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커다란 봉분 앞에는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후백제 왕 견훤능' 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견훤이 고려에 귀부한 후 고려군을 도와 견훤이 후백제를 칠 때 후백제군과 일전을 벌이고 잠시 쉬고 있을 때 그곳 지명이 「닭 다리 벌」이란 말을 듣고 「지네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내가 닭 다리 위에 있으니 어찌 살아날 수 있겠는가?」하고 패전과 죽음을 예언하고 앓다가 죽었다고 하며, 화병으로 죽었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견훤은 완산(전주)이 그립다 하여 전주의 완산 칠봉이 보이는 이곳에 무덤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견훤의 묘에 대한 기존 연구와 함께, 최근 새롭게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들을 토대로 그의 생애와 유적지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2020년 충남 논산시에서는 견훤 관련 유물 발굴조...


참고 자료

주의사항

저작권 EasyAI로 생성된 자료입니다.
EasyAI 자료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시고, 추가 검증을 권장 드립니다. 결과물 사용에 대한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AI자료의 경우 별도의 저작권이 없으므로 구매하신 회원님에게도 저작권이 없습니다.
다른 해피캠퍼스 판매 자료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용도로만 이용해 주셔야 하며, 수정 후 재판매 하시는 등의 상업적인 용도로는 활용 불가합니다.
환불정책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