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신구약 중간시대
1.1. 문화와 문학적 배경
1.1.1. 유대교와 헬라니즘의 대결
"헬레니즘 발생과 전파는 알렉산더 대왕(336-323BC) 이후 약 3세기 동안의 문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언어와 관습, 문명을 통일시키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생각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동쪽은 시리아의 셀류커스(Seleucids) 왕조와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ies) 왕조로 나뉘었으며, 이들이 다스리는 나라들에서 헬라화 운동은 급속도로 진전되어 갔다. 특히 종교자유정책으로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으며, 그 다음 로마가 통치할 때에도 헬레니즘 문화의 발전을 고취하게 되었다. 곧 헬레니즘 문화와 문명은 전체 그리스-로마(Graeco-Roman)의 특징이었으며, 유대인들의 반발과 그들의 신앙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상치되는 것이었다."
1.1.2. 헬레니즘 반대운동
헬레니즘 반대운동은 주전 167년경에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에 대한 종교 탄압과 헬라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헬라주의자들과 전통 유대인 사이의 세력 다툼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당시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은 뇌물을 사용하여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고, 안티오쿠스 역시 헬라적인 양식을 정비하길 원했다.
이에 반대세력인 전통 유대인들, 핫시딤이나 경건주의자들(바리새자의 전신)은 이러한 사실에 분노하였다. 하지만 대제사장 야손이 정통파 일원이라는 사실에 위로를 삼았다. 그러나 이내 상황이 변하여 헬라주의자들이 대제사장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가 뇌물을 바치고 야손을 몰아내고 대제사장이 되었다. 드디어 헬라파와 정통파 사이의 싸움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안티오쿠스는 헬라 문화와 종교를 통해 그 왕국을 통일시키려는 정책을 밀고 나가는 일에 있어서 반대 세력인 전통 유대인들이 자신의 심복인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한 것을 왕권의 모독한 행위로 간주하고 철저히 복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메넬라우스를 복직시켰으며, 군인들을 풀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토록 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교의 제도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통 유대교의 저항운동은 적극적인 공격으로 변하였다.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이 라는 마을에 하스몬가의 마타디아스라는 제사장과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이 이교제사에 저항하며, 핫시딤파에 가입하며 저항운동은 발전되어 갔다. 특히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은 마카비(대장쟁이)란 이름을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마카비 저항운동이라 불리우며,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추구하며 저항하였다.
이러한 마카비가의 저항운동은 완전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며, 하스몬가의 존속을 이어갔다. 하스몬 왕조란 마카비의 자손들로 70여 년간(134-63 B.C.) 유대인들이 독립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대제사장직을 물려받으면서 점점 더 세속화해감으로써 핫시딤과 정통파 사이에 불만이 고조 되었으며, 요한 힐카누스 때에 유대교 내의 불화가 표면화되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헬레니즘의 강압적인 힘으로 진압되고 말았지만, 유대교는 계속 전파되어 갔다.
1.2. 성서 백성
1.2.1. 토라종교
토라종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시로, 토라란 이름이 붙여진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에 의해 전해진 토라는 서기관들에 의해 해석되고 가르쳐져 후세에 전해졌으며, 점점 유대인들의 경건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대교는 토라에 전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만, 토라의 의미나 해석에 있어서는 다양한 견해를 가졌기에 많은 당파와 종파들이 존재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열심당 등이다. 이들은 토라에 대한 열심은 같았지만 그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유대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했다. 토라를 보호하고 전수하는 것이 곧 조상의 신앙을 고수하는 것이었기에, 마카비운동이나 로마의 통치시대에도 토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토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정은 헬라주의자들도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는데, 이는 토라가 유대교의 구심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2.2. 토라와 종파들
토라와 종파들은 유대교 내부에서 그 해석과 실천에 대한 다양한 견해로 인해 여러 종파들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유대교는 토라에 전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만, 토라의 의미와 해석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리새파는 토라의 구전 전통을 강조하며 헬레니즘의 침투를 막는 역할을 하였다. 회당에서 토라를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율법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외형과 형식에 치우친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두개파는 부유한 귀족층과 제사장 계급을 대표하는 단체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두개파도 토라를 믿었지만 구전의 율법을 인정하지 않아 바리새파와는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헬라의 영향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엣세네파는 정회원이 고행생활을 하며 광야에서 살았고, 성경과 그 외 종교서적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열심당은 마카비의 후계자로 보이며, 종교적인 확신을 가진 애국자들의 모임으로 토라에 대한 열심이 있었다.
쿰란 계약공동체는 엣세네파의 한 분파로 추측되며,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맹세한 계약공동체였다. 이들도 엣세네파처럼 엄격히 토라와 그 외 종교서적들을 해석하고 연구하였다.
이처럼 토라에 대한 해석과 실천에서의 차이로 인해 유대교 내에 다양한 종파들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토라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유대교 신자들이었다.
1.3.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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