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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자이너 프로필
1.1. Jan Tschichold (1902~1974)
얀 취홀트(Jan Tschichold, 1902~1974)는 20세기 초반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창조적 혁신을 이끈 선구적인 디자이너이다. 그는 바우하우스와 러시아 구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취홀트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며, 라이프치히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인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일찍부터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23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참관하면서 새로운 디자인 개념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그는 다수의 기사와 저서를 통해 비대칭적인 타이포그래피의 개념을 설파하며, 1928년에는 저서 『Die Neue Typoguaphie』에서 이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취홀트가 주장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능주의에 입각하여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명료성과 단순성을 추구하였다. 둘째, 비대칭적인 구성과 산세리프체를 활용하여 현대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셋째, 사진과 같은 객관적 이미지를 중시하였다. 이처럼 취홀트는 구성주의적 관념을 타이포그래피에 접목시켜 새로운 시각 언어를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19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되면서, 취홀트는 뮌헨에서 교직을 박탈당하고 스위스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그는 1930년대부터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에서 점차 손을 떼고,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로 회귀하게 된다. 그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나치 정권의 독일적 성향과 군사주의적 성격을 반영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40년대 후반 런던의 '펭귄 서적'에서 활동하면서 취홀트는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를 국제적으로 부활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대칭적 구성과 고전적 세리프 활자 스타일을 사용하면서도,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서적 디자인의 인간주의적 전통을 회복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취홀트는 1972년까지 스위스에서 디자인과 저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타이포그래피의 순수화, 명료성, 그리고 수단의 평이함을 추구한 그의 업적은 20세기 그래픽 디자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1.2.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칼 라거펠트는 1938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IWS(국제양모사무국) 주체의 디자인 콘테스트 코트 부문 제1위를 차지하며 데뷔하여 이 계기로 발망(Pierre Balmain), 파뜨(Jacque Path) 등의 오뜨꾸뛰르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의 패션 입문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디자이너는 피에르 발망이었다. 발망에게서 3년 간 도제수업을 받은 칼은 1965년 펜디의 책임디자이너로 패션계에 첫선을 보인다. 1964년, 당시 유행처럼 번져 오르던 프레타포르테계에 진출하게 되어 1970년, 프레타포르테계의 파이어니어라고 할 수 있는 클로에(Chloe) 사(社)와 계약하고 책임 디자이너로 결정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클로에 사의 디자인은 부인복 이외에도 모피, 구두, 속옷, 스포츠웨어, 수영복, 니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이 클로에 사와 칼은 절친한 관계로 오늘날까지 그 계약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 칼 라거펠트는 다카다 겐조(Dakada Kenzo)와 함께 '두 사람의 K'라고 불리며, 파리 프레타포르테 모드계에서 톱 디자이너로 뽑힌다. 그는 패션에 있어서 리드미컬한 율동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가장 중요시하며, 소프트하게 처리된 소매를 솔기가 없이 부착하거나, 가볍고 견고한 헴라인, 산뜻한 레이어드 등 그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봉제기술에 있다. 현대적인 감각의 페미닌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흐르는 듯한 율동을 표현한 아름다움이 매력이며,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코디에서 벗어나 위트있게 새로운 코디법을 제시하고 있다. 스타일의 혼합과 엄격한 피리지엔느의 쉬크(chic)함, 그리고 그의 컬렉션은 균형 잡히고 조화롭고 우아하며 프렌치 감각으로 세련되어 있다. '토털 룩(TOTAL LOOK)'에 자신을 보여 엘레강스하고 스포티한 팬츠 룩, 여유 있게 감싸는 랩 코트, 롱 카디간, 홀터 넥의 이브닝 드레스 등으로 사랑받고 있다. 1975년 4월, G.M.C(Group Mode Creation - 크리스티앙 디오르 부티크, 에마누엘 웅가로, 파랄렐,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슈, 클로에, 다카다 겐조, 소지아 리키엘의 프레타 포르테 메이커의 6개 회사에 의해 결정된 그룹) 결성 때 부회장에 선출되어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프레타포르테 창설 멤버로서 클로에 사(社)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1982년 샤넬 (Chanel)로 자리를 옮겨,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샤넬이 보여준 뛰어난 감각을 살리면서 진부한 측면은 가차없이 버렸다고 호평을 받았다. 1 세기를 지켜온 샤넬 라인에 그의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디자인 감각을 믹스시켜 샤넬의 정신을 살려나가 많은 칭찬을 듣게 되었다. 현재, Lagerfeld for men, Chloe, KL-Femme, KL- Homme등 4개의 브랜드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1.3.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장 폴 고티에는 1952년에 파리 교외인 아르쾨유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 대부분을 수업을 빼먹고 머릿속으로 컬렉션을 디자인하고 할머니에게서 미용과 화장의 기초를 배우며 보냈다. 18세 때 피에르 카르댕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데생 몇 작품을 본 피에르 카르댕은 그를 쿠튀르 회사에 입사시켰다. 고티에는 카르댕 회사를 거쳐 자크 에스트렐 회사와 장 파투 회사에서 디자인을 한 다음, 카르댕 회사로 되돌아왔다.
고티에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폐쇄적인 파리 패션 클럽에서 명성을 얻게 되며, 일본의 가시야마 그룹에서 겨우 재정적 지원을 얻게 된다. 이 지원으로, 그는 1979년-1980년 추동 패션쇼에서 제임스 본드를 테마로 한 최초의 컬렉션을 발표한다. 그리고 1981년에, 이탈리아 회사인 기보와 에콰토르가 고티에의 모험에 합류한다. 야광 장신구에다 남녀 공용의 체제 전복적인 패션으로 인기 대폭발을 일으켰으며, 1993년에는 향수도 제조했다. 당시 장 폴 고티에는 '파리 패션계의 무서운 아이'가 되어 있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고티에는 섹시한 여성과 남녀 양성적인 여성, 쾌락주의와 종교, 부르주아적 전통과 거리의 향수 등이 혼합된 다소 이율배반적인 영감의 원천들을 뒤섞었다. 1989년에 피터 그린웨이는 고티에에게 '이라'는 영화의 의상을 디자인 해달라고 부탁했다. 1년 후에는 마돈나의 무대 의상을 디자인했는데, 가슴 모양이 원뿔꼴인 유명한 코르셋도 그 중 하나다. 매스컴을 좋아하는 고티에는 음반을 내기도 했고, 앙투안 드 콘과 함께 영국의 텔레비전 방송을 공동 진행하기도 했다.
장 폴 고티에가 1976년에 최초의 독자적인 컬렉션을 발표한 것은 24살 때의 일이었다. 밀짚으로 만든 식탁 용구로부터 영감을 얻은 패션쇼를 파리(Palais de la Decouverte)에서 감상한 소수의 사람들은 컬렉션이 관심거리가 못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오늘 날, 고티에의 패션쇼 초대권은 얻어내기가 지극히 어려워졌다. 재봉사에서부터 마돈나에 이르기까지, 고티어의 모든 팬들은 초조하게 디자이너의 신(新)작품들을 기다린다.
장 폴 고티에의 패션은 강한 여성미를 강조한 과감한 디테일, 섹시함을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