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한국사회문제 C형: 지난 100년 간 한국의 도시들은 꾸준히 확장되어 왔다. 한국 도시가 확장되는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광복 이후 귀국한 국민들과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피난민들의 도시 이주이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인구는 서울과 부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후 농촌인구의 대규모 이농이 펼쳐진 1960년대를 지나,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1970년 이후에는 공업화로 인한 일자리가 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로 인가가 모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도시공간의 확장이 시도되었고 각종 도시사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난개발과 지나친 도시 집중으로 인해 각종 사회문제를 야기되었다.
2. 상계동 올림픽과 88 서울 올림픽
2.1.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상계동 주민들의 삶
1988년 서울 올림픽 기간 동안 세계의 언론매체는 대한민국의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시선을 비추고 있었으며,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려있는 대단히 큰 행사였다.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은 나라의 기쁨이며 국민들의 소망인 만큼 대한민국 모든 곳의 감동과 애정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상계동은 달랐다. 아이들이 울며, 어른들도 울었다. 아니, 울부짖으며, 괴로워하고, 억울한 소리만 들렸다. 올림픽을 빙자한 서울시 상계동 재개발은 상계동 주민들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었으며, 억울한 삶에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처럼 똑같이 세금을 징수하며, 88 서울올림픽의 행사를 즐길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상계동은 방값 싸고, 일터 있고, 정든 이웃이 있으며, 지하철 개통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히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재개발 바람으로 복덕방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처음 보는 복부인들의 등장으로 상계동 주민의 집터전의 주인행세를 하였다. 상계동 주민은 그들에게 없어져야 하는 물건이고 필요 없는 존재였다.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왔던 상계동 주민은 재개발 바람으로 인하여, 하나 둘씩 짐을 쌌으며, 어디론가 살 곳을 찾아 상계동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 일뿐 갈 곳이 없었던 다른 많은 상계동 주민들은 집을 뺏기지 않기 위해 부천시 공무원들과 정경들에게 돌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10여 차례의 강제철거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4명의목숨을 잃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상계동 주민들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으며, 물건취급을 당하건 육체적 고통을 받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는 농민들 싸움과 학생들의 대모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끝까지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각오로 상계동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87년 4월 14일, 상계동 주민은 쫓겨났다. 싸움의 결과는 상계동 주민의 패배로서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싸움일 뿐이었다. 주위에 보이는 건짐을 싸는 주민들, 그리고 울고 슬퍼하며 어쩔 수 없이 쫓겨나는 안타까움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울려 퍼졌지만, 88올림픽의 함성의 소리만 들릴 뿐, 그들의 울부짖는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2.2. 상계동 주민들의 투쟁과 패배
상계동 주민들의 투쟁과 패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진행된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상계동은 당시 방 값이 싸고 일터 및 정든 이웃이 있었지만, 올림픽을 위한 서울시 주도의 재개발 정책에 따라 주민들이 거주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상계동 주민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강력하게 저항했다. 열 차례 이상의 강제철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지만, 결국 1987년 4월 14일 쫓겨나는 패배를 겪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을 빼앗기며 슬퍼하고 울부짖었지만, 당시 정권의 강력한 힘과 공권력에 밀려 결국 상계동을 떠나야 했다""
쫓겨난 주민들은 인근 명동에 천막 생활을 하며 비참한 처지에 놓였지만, 이들의 고통은 당시 올림픽의 열기에 묻혀 외면되었다"" 결국 부천에 850평 규모의 땅을 얻어 새로운 터전을 잡았지만, 이마저도 부천 시청 직원들의 강제 철거로 인해 또 다시 터전을 잃게 되었다""
이렇듯 상계동 주민들의 투쟁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패배로 끝났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와 정권의 강압에 밀려 결국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내어줘야만 했다"" 이는 약자에 대한 국가의 무자비한 행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노원구청 조직분석
3.1. 노원구 구정 기본현황
노원구는 면적 35.44km2, 인구 528,887명, 세대수 217,987세대의 서울시 자치구이다. 노원구는 주택 중 아파트가 161,039호(74%)로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베드타운 지역이다. 행정기구는 1의회 6국 1소 3지소 1관 38과 19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정인력은 1,536명이다. 주요 기관으로는 공공기관 34개소, 교육기관 166개교, 의료기관 860개소, 종합사회복지관 9개소, 어린이집 374개소가 있다. 노원구의 예산 총액은 1,294,312,000,000원이며, 재정자립도는 15.4%로 서울시 자치구 중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노원구는 1914년 양주군 노해면에서 시작하여 1963년 성북구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도봉구에서 분리되어 1988년 노원구가 신설되었다.
3.2. 관할지역 분석
노원구의 관할지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파트 밀집지역이다. 노원구 지역은 1980년대 논밭, 무허가 공장 등의 빈민지대였지만,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국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대단지 아파트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관내 주택의 대부분이 아파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울시 자치구 중 아파트 세대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 하지만 중계동 백사마을, 상계동 희망촌, 양지마을 등 무허가 판자촌(달동네)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노원구의 용도지역 중 주거지역이 64%를 차지하여 전형적인 베드타운으로 불리고 있다.
둘째, 임대아파트 및 임대주택 밀집지역이다. 1980년대 대단지 아파트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저소득 주민을 위한 영구임대 아파트가 많이 조성되었다. 영구임대아파트 외에도 행복주택, 매입임대주택 등의 저소득 가구용 주택이 많은 편이다. 이러한 환경으로 복지대상자수(수급자, 차상위 등)가 약 36,000명으로 서울시 자치구 중 상위권에 속한다.
셋째, 대규모 상권 지역이다. 4호선과 7호선의 환승역인 노원역은 하루 유동인구 9만여 명의 대형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주변에 주공 아파트 단지, 학원가, 롯데백화점 등이 밀집해 있어 다양한 업종이 복합적으로 발달해 있다. 또한 중계역에는 학원가가 형성되어 있어 주부와 학생들의 주요 소비 거점이 되고 있다.
넷째, 자연 명소 지역이다. 노원구의 대표적인 자연 명소로는 수락산, 불암산, 중랑천 등이 있다. 이러한 자연경관은 구민들의 여가 및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섯째, 정치적 성향이 민주당계 강세이다. 최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를 볼 때 노원구는 민주당계 후보의 당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에는 보수계열 인사의 당선도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 민주당계 후보의 당선 비율이 높다.
3.3. 노원구 조직구성 및 추진업무
노원구의 조직구성 및 추진업무는 다음과 같다"
노원구는 현재 1담당관, 2담당관, 6국 39과, 1보건소 4과 3지소로 구성되어 있다. 정무직공무원 1명(구청장)을 필두로 총 1,534명의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전형적인 피라미드형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규 직원들은 대부분 서울시 공개경쟁채용으로 임용되며, 인력채용은 서울시에서 통합적으로 선발 후 자치구에 배정받고 있다.
구청장은 민선 7기 구청장인 오승록으로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출신이자 서울시 시의원 경력이 있다. 주요 공약으로는 KTX 의정부연장선 광운대역 정차 추진, 민간어린이집 차액 보육료 전액지원, 수락산 노원치유의 숲 조성, 수학문화관 건립, 도봉운전면허시험장 이전, 바이오메디컬단지 조성 등이 있다.
각 부서별 주요 업무를 살펴보면, 감사담당관은 구 감사계획 수립 및 민원처리, 미디어홍보담당관은 구정홍보와 NBS 운영, 행정지원국의 행정지원과는 청사관리와 공무원 인사, 자치안전과는 행정구역 및 민방위 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