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대 한국근대사 인물재평가 과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1.1. 궁예와 명성황후 선정 이유
1.2. 역사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필요성
2. 궁예
2.1. 궁예의 일생
2.1.1. 궁예 출생기
2.1.2. 궁예 세력 신장기
2.1.3. 궁예 세력 쇠퇴기
2.2. 궁예의 정책
2.2.1. 신라에 대한 적대감
2.2.2. 국호의 변경
2.2.3. 자주적 연호 사용
2.2.4. 궁예의 호족 정책
2.2.5. 미륵(정토) 신앙
2.2.6. 농민 정책
2.3. 궁예에 관한 기존 인식
3. 명성황후
3.1. 명성황후의 생애 및 업적
3.2. 명성황후의 장단점
3.3. 명성황후에 대한 해석 및 평가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1. 궁예와 명성황후 선정 이유
궁예와 명성황후를 선정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미디어에서 발생한 신조어로 인해 궁예에 대한 편견적 사고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 인터넷 사회가 활성화되며 역사를 접하는 통로가 다양해졌다. 대중들은 학교 수업 외에도 영화, 드라마, SNS, 소설 등을 통해 쉽고 친근하게 역사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사용된 궁예의 '관심법'이 "다른 사람이나 유명인의 속내를 지레짐작해 근거 없이 멋대로 추측, 판단하는 행위"를 비꼬는 신조어로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궁예의 이미지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둘째, 궁예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인간 활동으로 형성되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가 통일되지 않거나 한쪽으로 편향될 수 있다. 전성기의 궁예가 왕건보다 강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정치적으로 패배함으로써 궁예의 역사 또한 왕건 왕조로의 교체에 대한 당위성을 주는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후고구려 정권이 이어졌다면 궁예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1.2. 역사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필요성
역사는 인간 활동으로 형성되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가 통일되지 않거나 한쪽으로 견해가 쏠리는 경우가 있다. 전성기의 궁예는 왕건보다 강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정치적으로 패배함으로써 궁예의 역사 또한 왕건 왕조로의 교체에 대한 당위성을 주는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만약 궁예가 축출되지 않고 후고구려 정권이 이어졌다면 후세에도 궁예가 악랄하게 평가되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처럼 역사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역사 인물에 대한 편향된 평가를 극복하고,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과 업적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 궁예
2.1. 궁예의 일생
2.1.1. 궁예 출생기
궁예(弓裔)는 김씨 성의 신라인으로 제47대 헌안왕 혹은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출생 당시에 나타난 상서로운 일들로 인해 왕에게 버림받아 애꾸눈이 되고 유모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다. 이처럼 궁예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지만,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버림받고 유모에 의해 양육되어 성장했던 것이다. 그의 출생 과정에는 왕실 내부의 갈등과 배척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족 내 배제와 소외는 이후 궁예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하여 그의 반신라적 성향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가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 자라났다는 점은 그의 성장기부터 기존 질서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2.1.2. 궁예 세력 신장기
궁예는 10살이 되었을 무렵 유모에 의해 자신이 낙향 진골 귀족임을 알게 되자 강원도 영월 세달사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혼란스러운 신라 말 정치 상황을 틈타 절을 나서고 죽주에 자리한 기훤의 밑으로 들어갔다. 기훤에게 중용되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북원에 자리한 양길의 부하가 되어 명주를 손에 넣고 장군으로 추대된다. 이후 양길에게서 벗어나 강원도 일대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궁예는 송악을 장악하고 있던 왕건 가문을 흡수하여 중부지방 대부분을 그의 세력으로 만들어 전국의 2/3가량을 차지하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2.1.3. 궁예 세력 쇠퇴기
궁예 세력 쇠퇴기를 살펴보면, 궁예는 자신을 임금, 미륵불이라 칭하며 관심법을 통해 무자비한 살인 행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가 폭군으로 변모해 결국 민심까지 돌아서자, 왕건이 부하들과 함께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 탈출했으나, 918년, 백성들에게 살해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궁예가 백성들의 민심을 상실하고 폭군화되자 왕건이 이끈 부하들이 궁예에 대한 역성혁명에 나섰다""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 도주하다 결국 918년 백성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참고 자료
홍창우, 2022, “삼국사기의 궁예 가계 및 출생 관련 정보에 대한 후대의 수용 방식 문제”,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제 199집
김주성, 2019,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미정책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제47호
『삼국사기』 권50, 列傳10, 甄萱
궁예 (弓裔), n.d, 한국미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789
위키백과. 명성황후
https://ko.wikipedia.org/wiki/%EB%AA%85%EC%84%B1%ED%99%A9%ED%9B%84
나무위키. 명성황후
https://namu.wiki/w/%EB%AA%85%EC%84%B1%ED%99%A9%ED%9B%84
나무위키. 명성황후 생애
https://namu.wiki/w/%EB%AA%85%EC%84%B1%ED%99%A9%ED%9B%84/%EC%83%9D%EC%95%A0
나무위키. 명성황후 평가
https://namu.wiki/w/%EB%AA%85%EC%84%B1%ED%99%A9%ED%9B%84/%ED%8F%89%EA%B0%8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성황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97
우리역사넷. 명성황후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0800&code=kc_age_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