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철학에서 본 인간의 본성서양과 중국철학의 차이점은 서양은 세계관, 인간관, 인식론(진리관)을 구분하여 철학이 발달하였다면 중국은 세계관, 인간관, 진리관을 전체적으로 조명하므로서 철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고대 중국철학은 인간의 본성은 천(天)이 준 것이라 생각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권력도 천이 준 것이라 하였고, 한 편으로는 천(天)은 유덕한 자를 선택하고 포악한 자를 버리기 때문에 천명을 받은 자는 그것을 유지하기위해 수덕이 요구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본격적인 중국철학의 입장에서 인간의 본성의 탐구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살펴봐야 하는데 그 이전의 철학은 종교, 정치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만의 영역과 전문성이 떨어졌다면(서양에 비해 중국철학이 늦게 발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중국철학의 특성상 인간의 문제에 대해 주자학부터 바라보는 것이 중국의 인간관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대의 주자학은 동양 사상에서 유불도의 종합, 유학사에서 한대유학과 북송 도학의 종합, 송대 사상에서 우주론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의 종합을 통해 중국철학의 특성을 나타냈고 지금까지 중국철학의 근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먼저 주자학의 주요 개념인 리와 기를 살펴보면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만물과 시공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기로서 정의되며 우리의 마음도 하나의 기이다. 리는 개별 사물이 가진 이치로서 그 사물이 갖는 특성을 포함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 사물은 같은 기를 받아 생기는 것이지만, 인간은 그 기의 바르고 잘 통하는 것을 얻어 리가 잘 통하여 지각이 있고, 다른 사물은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어 리가 잘 통하지 않아 지각이 없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주의 생성원리를 통해 생성된 인간은 그 근본이치가 내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가지는 본연지성과 그리고 받은 기의 차이에 기질지성을 나타낸다. 한편,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천지라는 커다란 음양의 원리가 작용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내 생명세계관과 역사관을 알아야 하며 나아가 시대상황과 인도철학이 불교에 미친 영향등을 알아야 한다. 먼저 소연경의 내용을 살펴보자. 인류의 기원은 천지의 마지막 겁이 다해 무너질 때에 중생은 목숨을 마치고 다 광음천에 났는데, 그들은 자연히 생겨났으며 사(思)의 기쁨으로써 먹이를 삼고, 신족으로써 허공을 날아다녔다. 담샘이 솟아나 그 것의 맛남을 깨닫고 먹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의 묘한 법과 신족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담샘을 많이 먹은 자와 적게 먹은 자와의 구별이 생기고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중생들이 쌀을 먹고, 성교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경쟁적으로 축적하게 되면서, 점점 타락하게 된다. 이러는 가운데 정치가 필요하게 되어 크샤트리아가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중생중에 고요히 도를 닦으려는 사람이 나오고 여기서 브라만이 나오게 된다. 시간이 흘러 브라만 중에 고요히 앉아 참선하고 명상하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나와 다시 속세로 내려오게 되고, 중생 중에 살림을 즐겁게 경영해 많은 재보를 모은 사람도 있게 되는데 바이샤가 나오게 된다. 또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는데 수드라의 기원이 된다. 당시의 시대에는 사성계급이라 하여 제사를 관장하는 브라만계급, 정치를 하는 크샤트리아 계급, 상인인 바이사 계급, 수공업에 종사하는 수드라 계급으로 나누어진 시대였다. 그리고 인생을 하나의 창조, 파괴, 재창조의 연속으로 바라보는 이론들이 유행하였다. 그러한 영향을 받은 불교는 윤회와 깊이 연관하게 된다. 계속 창조, 파괴, 재창조의 연속에서 우파니샤드는 어떤 실재를 주장하였지만, 불교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부정이 아닌 존재론적 실재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불교는 무명과 욕망에서 나오는 일체의 행위가 고통이라고 보고 있으며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존래라는 점도 상정하고 있다. 크게 인간의 두 종류로 나눈다면 범부와 사문이다. 범부는 색성향미촉으로 이뤄진 세간에 마음을 둔 자이고, 사문은 부동(不動)에 마음을 둔 자이다. 그러기 때문라톤은 단순한 형태의 원과 복합체인 집, 불의 이데아를 그의 저서에서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복합체인 인간에 대해 이데아(이데아를 알아야만 인간의 정의를 규정할 수 있다.)를 명쾌히 설명하지 못하였지만(그러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다.) 무전제적인 것의 직관을 통해 바라 본다면, 현상에 대해 여러 상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성을 가진 존재라 정의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육체도,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도 아니며, 오직 영혼이라고 보고 있다.(영혼은 욕망, 의지와 결정의 능력, 이성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중에서 특히 이성이라 보고 있다.) 인간과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성이며, 이것은 유물론적 시각에서 보는 육체가 먼저이고 이성이 나중인 것과 구별된다. 플라톤 시대에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팽배해 있었고, 플라톤이 인간이 바라볼 때 이성은 있는 듯 마는 듯 육체를 살찌우는 쾌락과 부만이 관심사였다. 플라톤은 영혼의 3가지 요소중 욕망 때문에 이데아에 접근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육체로 인해 욕망이 증가되기 때문에 육체를 창살(방해물)로 보고 있다. 철학이 인간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인간이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라면 욕망보다는 당연히 이성이 우선시 되어야 하기때문에, '이러한 조건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입증됨을 통해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직관'에 대한 인간의 이데아가 설득력을 갖게 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존재와 당위의 절묘한 결합이다.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 이성이라 할 때 인간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현실적 실상이 아니라 당위적 실상을 의미한다. 현재 인간은 이러이러한데, 본래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할 때, 전자도 실상이고 후자도 실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성을 잃으면 동물이 되는 것일까? 플라톤의 운동론을 살펴보면 운동에는 운동의 원인이 자신의 밖에 있는 것, 즉 밖으로부터 운동을 받아서 그것을 다른 것으로 전달하는 운동과 타자화하지 않고 계속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운트가 주장하듯이, 동물은 감정이 없다는 의미에서 기계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확실히 인간을 대상으로 파악해야 하며, 관찰에 의지하여 경험적으로 인간을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기계이긴 하되, 스스로 발동을 거는 기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방법에 의하여 영혼의 정체를 최대한 가깝게 추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아직까지 인간은 여전히 비밀인 체로 남아 있다. 인간을 완전히 대상화하여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포이에르바하이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인간을 살아 있는 물질로 보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동료 인간과의 구체적인 관계에서 존재하는 자로 보는데 있다. 그는 종교를 신 개념 안에서 세계를 자기에게 관계시키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 대신에 우리와 관계를 맺는 세계라 보았다. 이런 도식 아래서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동물과는 달리 나와 너의 관계에서 살고, 생각하며, 현실을 대처하는 특이한 존재로 보았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만남과 상호 관계를 순전히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사건으로 해석한다. 가령 사랑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접촉이라 보았다. 포이에르바하는 몸이 곧 영혼이라 생각했다. 포이에르바하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란 타인과의 상호 관계 가운데서도 순전히 물질적인 존재요, 유기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기적인 존재라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내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는 각각 다른 차원의 현실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르키게 된다고 보고 있다. 즉, 주관성의 차원에서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객관성의 차원에서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상당히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포이에르바하는 주관성의 차원이 개인에게 존재한다고 보고 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적인 어떤 집단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인간 각자의 경험등의 개인성이 무시되었다. 유물론적인 견해는 영혼은 몸을 벗어나 고유의 영역을 가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철학과 같이 생각해봐야 한다. 아직까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미지(未知)의 존재(유가에서 말하는 天이 나타나서 인간의 본성의 근원의 문제를 말해주기 전까지, 불교에서의 소연경이 증명되지 않았기에, 형이상학에서의 이데아를 볼 수 아니면 그 것이 완벽히 이해되지 않았기에)로 남아 있는 인간에 대해 본성은 어쩌면 소모적인 논쟁거리 이다. 우리는 유물론적인 사고에서 인간의 본성을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발달한 유물론은 상당히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이데아에서 본 영혼, 불교에서의 윤회, 중국철학의 우주관중에 어떤 것이 사실(진실)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지금의 현실에서는 종교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위 중 어떤 사상이 나중에 진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앞으로 우리가 말하려는 유물론이 무의미한 얘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지금 현실의 문제를 떠나서는 안되며 지금의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눈금 간격이 1cm인 30cm자로 물건을 잿을 때 5.5cm라고 말할 수 있으나 5,54cm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철학은 인문과학이라는 어떤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유물론에서 볼 때 영혼 혹은 인식은 고도화된 물질의 집합체이다. 그것은 조금씩 과학으로서 증명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고 의학과 생물학적인 객관성에 갖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유물론적인 시각에서 지금의 현실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플라톤의 철학은 인간이 어떻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을 중점을 두었기에 이데아라른 개념이 나타났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학은 어떤 직관에 의한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면서 조금씩 그영역이 축소되어 왔다. 플라톤이 말하는 고정불변의 진실이 무너지면서 오히려 한 순간에 무너지는 위험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불안감을 더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의 대안으로 형이상학내에서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