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복제 시술은 비도덕적 행위인가?인간복제 시술은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하나의 복제 인간을 완성하기까지의 과학 기술적인 장애와 복제 인간을 만드려고 하는 목적이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비윤리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복제에 성공하더라도 그후에 겪게 될 윤리적인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인간복제는 인간 전체를 유전자적 동일한 형체로 복제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복제도 동물 복제의 기술과 다르지 않다. 199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복제양 `돌리'를 기억할 것이다. 인간복제는、돌리′탄생 때와 거의 같은 방법을 사용해 시도되고 있다. 이 경우 먼저 원본인간(복제할 사람)의 체세포를 추출하고, 동시에 한쪽에선 인간난자를 채취해 핵을 없앤다. 이어 원본인간의 체세포를 핵이 제거된 난자에 이식하고 이식된 난자에 전기충격을 가해 세포를 융합하면 정자와 난자가 결합했을 때처럼 수정란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그런 다음 체외에서 세포분열을 유도하고 배아 단계의 세포 덩어리가 되면 이를 대리모 자궁에 착상시켜 임신을 유도하고 9개월 동안 키우면 복제아기가 태어나게 된다.하지만 이 과정은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며 실제로 동물복제에서도 성공확률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복제양、돌리′도 277번의 실험 끝에 성공한 것이다. 50%는 임신중 유산, 20%는 태어나자마자 죽는다고 한다. 、돌리′탄생 때와 같은 해인 1997년에 복제송아지、영롱이′를 탄생시킨 황우석 서울대 교수(수의학)는 현 과학 수준으로는 인간 난자 1000개를 이용해 만들수 있는 복제배아는 100개 수준이며, 100개 복제배아를 자궁에 착상시켜 정상적으로 분만할 확률은 1개가 채 안된다 고 설명한다.동물복제의 경우 임신중 나타나는 문제는 주로 태아 과체중, 급성 양수 과다증 등. 이는 사산 혹은 유산으로 연결되며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설사 출산에 성공하더라도 출생 직후 혹은 자라면서 심장벽 결손, 간팽창, 뇌 수종, 척추 결손, 허파 일부 무형성 등 장기에 이상이 생기는 예가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한다. 또 면역력 결핍으로 감염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례도 나타난다고 한다.이것이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해 보자. 끔찍한 재앙이 아닐수 없다. 실패된 아기들은 기형아로 탄생되거나 수정란으로 버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1명의 복제 인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게다가 올 2월에는 최초의 복제양인、돌리′가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해 인간을 포함한 동물 복제의 조로현상이나 돌연사, 기형에 대한 위험이 다시 한 번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올해로 6살이 된、돌리′는 태어날 때부터 수명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텔로미어 가 짧았던데다 1999년부터 노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해 복제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받아왔다.、돌리′의 사망원인이 복제 과정에 의한것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으나 개연성을 배제 할 수는 없기 때문에、돌리′의 죽음은 인간복제의 위험성에 다시한번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복제 기술의 안전성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낮은 성공률과 기형아 출산의 문제점등이 예견되는 것이다.인간복제는 동물 복제와 다르지 않으나 그 목적이 다르다. 동물 복제가 어렵게 얻은 좋은 형질의 동물이나 유전자 재조합 동물을 쉽게 대량 증식시키는등의 목적이라면 인간복제는 주로 불임 부부가 본인의 체세포 복제를 이용해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을 각기 원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는 자신의 복제 인간의 장기를 이용하려는 것이 주요목적이며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며 법적으로 인간 복제를 금지하는 까닭이라고도 한다. 복제 인간의 장기는 조직거부 반응과 장기 수급 문제를 해결하여 장기 손상으로 살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제 인간도 다만 탄생과정이 보통의 사람과 다를 뿐, 하나의 인격을 가진 인간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죽어가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인간을 희생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매매등이 법적으로 금지 되어 있는 것인데 장기를 이용할 목적으로 복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나아가서는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행위이며 윤리적으로도 어긋나는 행위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장기 이용 문제가 아니어도 사실 인간복제는 비윤리적인 목적에 쓰일 가능성이 크다. 힘든 작업이나 생존력이 희박한 상황에 투입되고 인체실험 재료로 쓰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복제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복제 인간의 탄생이 과거의 노예제도와 일제식민지 시절의 실험용 인간, 즉 마루타의 부활을 예고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뿐만 아니라, 인간 복제시 어떤 체세포 복제에 의해 개체가 태어났을때 감성적인 측면, 지능적인 측면까지 같다는 것은 복제 가 육체적인 특성에 그친다는 것을 과잉 해석한 것이라고는 하나, 복제인간은 세포 제공 모체의 유전형질에 따라 신체가 발달하기 때문에 지문이 같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가능성은 복제 인간이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위의 목적중 하나인 불임부부의 해결책으로 인간복제가 허용된다 하여도 야기되는 문제는 있다. 바로 가족·혈연 관계가 조금 복잡해 진다는 것이다. 남자 복제인간이 태어났다고 하자. 그는 원본인간의 자식인지 동생인지, 그의 어머니는 원본인간의 부인인지 대리모인지 혼란스럽다. 현행 법에 따르면 아기는 자신을 낳아준 여성을 어머니로 갖게 된다. 아버지는 출산 당시 산모의 법적 배우자로 보는 것이 우리 민법이다.박은정 이화여대 교수(법학)는 "불임부부로부터 의뢰받았다 할지라도 복제아기를 출산한 대리모가 원칙적으로 어머니 자격을 갖는다"며 "대리모 계약은 법적 효력이 없으며, 원본인간 부부가 아이를 입양해야만 부모관계가 성립한다"고 말한다. 사실 복제인간은 원본인간보다 훨씬 늦게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복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빼닮은 후손을 갖고 싶어하는 불임부부, 독신자, 동성애자 등이라는 점에서 관계설정이 쉽지 않다고 한다.또 하나 문제는 사춘기에 접어든 복제인간이 자신의 유전적 실체를 알게 됐을 때다. 스스로를 남들과는 다른 복제품 으로 인식한다면 그에 따른 정신적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복제는 신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게 절대 다수의 주장이다.인간복제의 기술이나 목적을 따지는 문제들이 아니더라도 인간복제는 유전적 다양성을 훼손 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생학적으로 보다 건강하고 지적 수준이 높은 자녀를 얻고 기형이나 불구,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 있는 후세를 배제하기 위해 선택적인 복제를 하게 되는데 많은 문제점이 따를것이다.
전쟁과 사회를 읽고...[전쟁과 사회]라는 책은 한국전쟁 참가군인과 그 가족, 이산가족, 피학살 민간인 등 피해자 입장에서 다시 쓴 한국전쟁 연구서다. 저자는 피해자의 관점으로 피난, 점령, 학살로 전체 내용을 구성했는데, '피난'에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지배층, 민중이 각각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폈다. 또 '점령'에서는 인민군의 남한 점령과 민중동원 과정을 통해 남북한의 정치적 입장 차이와 전쟁의 연관성을 해석하고, '학살'에서는 국가가 전쟁 중에 주민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취급했던 사정을 따진다.이 책은 '한국전쟁이 일반 민중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오늘의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서 출발한다. 그동안 전쟁의 원인과 책임, 국제 역학관계 등에만 매몰돼 있던 연구시각에서 한발 나아간 것이다. 저자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민중이 당한 비참함과 인간 존엄성의 훼손은 오늘날 극우 반공주의의 광기, 소외계층의 궁핍과 사회적 배제 등의 현상의 원인이 됐다고 본다. 극적인 남북 화해가 이뤄진 지금 이데올로기적 편향에서 풀려난 이런 시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기존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남한과 미국을 중심으로 '북한의 김일성과 스탈린의 적화야욕에 의해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다'라는 감정적인 시각이 지배해 왔다. 이러한 관점을 '전통주의적 관점'이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이나 중국은 '미국과 남한의 침략야욕, 자본주의적 팽창야욕에 의해서 북침이 이루어졌고 그것에 대항해서 38선 이북을 지키기 위한 조국방위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 내에서 '수정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연구경향이 제기되었다. 이 수정주의적인 경향은 베트남전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의 본질이라는 것이 미국정부에서 선전하는 것과 같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미국 자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남북한의 군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의 지원이 없을 경우 남한 단독으로 북침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무성 문서는 남한의 지원 요청에 대한 미국의 거부 태도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한 자료는 남한 측이 미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지원을 얻어내고 국민들에 대한 통치이데올로기로서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과장된 선전 내용일 가능성이 보다 크다. 또한 당시에 발견된 북한군의 군사작전 문서에서는 북침이라는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구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되고 있는 러시아 문서들 또한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전면적 북침설과는 반대로 전면적 남침설, 북한은 중국, 소련과의 협의 하에 계획적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했다는 여러가지 근거가 뒷받침되고 있다. 우선 1950년 6월25일 직전에 나온 북한의 '인민군 정찰명령서 제1호'와 '인민군 전투명령서 제1호'가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역시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후르시쵸프는 김일성이 스탈린, 모택동과 사전 의논한 후에 전면 남침을 감행했으며, 거기에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세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38선에 있었던 북한의 군대가 전 병력의 반도 되지 않았던 점, 38선 전 전선에 걸쳐 동시에 남침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아쉽게도 "총을 쏴라"라는 명령서가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은 남침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전면적',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가에 의문을 던지는 근거가 되고 있다.이러한 전면적, 계획적 개전설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수정주의적 경향의 연구자들은 '남침유도설'을 제기하였다. 즉, 남한의 이승만정권과 미국이 의도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을 통해 남한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우선 당시 불안정했던 남한의 정치상황과 경제상황에 의해 뒷받침되고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애치슨 연설이 있은 직후 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를 통해 애치슨에게 감사의 뜻을 표명하였으며 북한측은 미국의 의도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이렇게 한국전쟁의 개전에 관한 논의들이 분분한 가운데 최근 나오고 있는 주장이 '제한전쟁설'이다. 이 주장은 전쟁이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49년과 1950년을 통해 계속 발행하고 있었던 38선에서의 국경분쟁의 연장선상에서 전쟁의 발발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첫째로 1950년 남한에서 실시된 5.30 총선과 에서 볼 수 있는 북한의 평화통일 제의이다. 1950년 실시된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장건상, 조소앙, 안재홍 등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 이들은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제1대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일부는 당선되었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으로 약칭) 계열의 단정수립을 추진한 인사들이 대거 탈락했다. 이 선거 직후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는 남북한 국회가 합작을 통해 평화적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제의를 하였다. 전면남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평화통일 제의를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에서 북한이 침략적 의도를 숨기기 위한 의도적 전술이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6월28일부터 6월30일까지 3일동안 한강을 건너지 않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면적, 계획적 남침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즉, 북한은 서울만의 점령이라는 제한적인 전쟁을 통해 남북한 국회의 합작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3일간의 체류는 전쟁 직후의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둘째로 전쟁 발발 직후의 정황이다. 무엇보다도 6월25일의 시점에서 38선상에 배치되었던 북한의 군병력이 전체 병력의 반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만약 계획적으로 전면전을 감행했다면 그 정도의 병력으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개전 직후 미국과 유엔의 파병결정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을 북한은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유엔군이 참전하더라도 군사적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서울에서의 3일간의 체류는 북한으로부터의 보급을 기다리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도 크다.그런데 우리가 이상과 같이 전쟁의 개전에 관해 논의하면서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증거여부가 아니라 전쟁의 개전에 관한 논의가 한국전쟁의 원인, 과정, 성격을 규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우리 민족 내부의 싸움이고, 그 싸움이 결과한 피해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전쟁을 먼저 일으켰던 사람은 분명히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세계사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가 전쟁의 모든 성격을 규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예는 전혀 없다. 전쟁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그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고, 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보다 중요한 부분이다.세계1차대전이나 2차대전에 대한 논의를 보더라도 누가 총을 먼저 쏘았는가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양차대전의 원인과 성격, 그리고 그 결과로 조성된 세계체제의 개편을 밝히는 문제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한국역사에 있었던 여타 전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조선 시기 중국과의 전쟁에서부터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전쟁도 개전에 초점을 맞추는 전쟁은 없다. 결국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가 전쟁의 개전 문제에 계속 머물러 있는다면 이것은 한국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가로막을 것이다.전쟁기간동안 남북한의 정세를 보면 한국전쟁은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 기간을 통해 남북한 정권은 많은 변화과정을 겪는다. 특히 남한의 이승만정권은 한국전쟁의 기간 동안 이전에 비해 안정된 정치상황을 조성하면서 이승만과 해 이승만에 대한 지지도는 땅에 떨어졌다. 이승만은 이러한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국회 밖에서는 정부가 동원한 관제데모가 일어났고, 이들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은 국회의원들을 소환하라는 소리가 높게 일어났다. 그래도 국회의원들이 꿈적도 하지 않자 이승만은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에 등원하던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과 연락한 혐의로 국회의 동의도 없이 체포하였다.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유엔군 사령부와 미국이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명목 하에 대한민국정부를 돕기 위해 유엔을 동원하여 한국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기본적인 의회민주주의마저도 부정하면서 정권 연장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유엔군에 참여하였던 영국과 호주는 미국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미국은 유엔군의 일부와 이종찬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군의 일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승만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장택상 중심의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고, 군대가 국회를 포위한 상황 하에서 표결을 강행해 결국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지면서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1953년의 '반공포로협정'을 둘러싸고 다시 표면화하였다. '에버레디(Everready) 계획'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이승만이 휴전협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를 감금하고 다른 인물이나 군부로 하여금 정권을 잡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계획도 실행되지 않았다. 이승만이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대신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약속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철저한 지원 속에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었다.혹자는 이러한 이승만과 미국 간의 외교적 갈등에 대해, 이승만이 외세에 대해 자주권을 행사했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외교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물론 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미국으로 얻어냈다는 점에서 이승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유익한 외교술이 되었을 것이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