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조사와인물평전(왕현종교수님)2009211191 전성하‘요코 이야기’ 에 대한 나의 생각역사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항상 고민했던 문제가 있었다. 바로 역사라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중심으로 서술하는지의 문제이다. 아마 한국인들은 한국중심의 역사를 미국인들은 미국 중심의 역사를 쓰게 되어 있을 것이다. ‘요코 이야기’가 가진 논쟁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우리나라의 일반 대학생 이였다면 솔직히 요코 이야기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 일제하에 엄청난 수난과 고통을 겪었던 우리민족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사람으로 묘사 했다는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미국에서 영어교재로까지 쓰였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로서 역사가의 정신을 마음에 담고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분명 일본인작가가 실화라는 울타리를 두고 실제역사를 왜곡하여 한국인을 묘사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인에게 핍박과 고통을 겪은 것은 우리 민족 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송호근 칼럼에서 이 문장에 주목하였다 . “그 장면의 진위에만 매달리면 ’저항적 민족주의‘의 투박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왜 우리 모두는 그 한 장면에 열분을 토하며 분노를 하는 것일까. 더 이상 국수주의 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해서는 안된다. 분명 역사를 오해하게 만든 부분은 잘못이지만 송호근 칼럼에서 언급한 것처럼 더 깊이 이야기를 보고 작가의 의도를 보아야한다. 모든 사람들이 전쟁의 희생자이고 전쟁은 반드시 사라지고 없어져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기가 바뀌고 문화도 변하면서 점점 세계화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다. 각자 민족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제국처럼 ’세계시민주의‘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 할 때이다. 솔직히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것은 우리나라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요코 이야기‘가 역사를 왜곡했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바른 역사를 이 세상에 알리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을까? 따지고 본다면 작가는 어떤 것이든지 이야기로 쓸 수 있다. 다만 그 책이 어디서 얼마나 많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보게 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런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노력을 제대로 했다면 이런 문제에 시시콜콜 반응이나 하였을까 싶은 생각이다.’요코 이야기‘와 비슷한 ’국가의 품격은‘ 우리민족을 좋은 시선을 바라봤고, 25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둘 모두 일본인이 쓴 것이지만 둘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은 천지차이이다. 우리민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둘을 제 3자인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이 보았다고한다면 그런 장면 하나하나에 연연하기보다 그 작품에서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보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일본이 얼마나 식민지들에게 잔혹하게 행동하였는지는 잘 알 것이다.
명가(名家)와 예술의 결탁(피렌체, 르네상스를 꽃피우다)1. 서론2. 메디치가 - 르네상스 대부의 탄생3. 인간을 찬양하고, 현실 세계를 동경하다.4. 후원제도 (patronage system) - 지배의 도구5. 결말1. 서론르네상스는 오랫동안 유럽 역사에 있어 다른 어느 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아름다움을 지녀왔다. 르네상스라는 단어에서는 모든 생활이 그대로 예술 작품이며, 다재다능한 초인들, 천재적인 화가와 조각가들의 활약, 세계와 인간의 새로운 발견 등의 찬란하고 다채로운 정경이 상기된다. 아마도 그것은 중세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르네상스 시대가 더 밝고 풍요롭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비로소 작품에서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으며 신만큼이나 혹은 신보다 더 자연과 인간이 존중받고 찬양되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는 단연 돋보인다. 그러한 중심에 피렌체라는 도시가 있었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진정한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만든 메디치(Medici) 가가 있었다.피렌체등의 여러 도시에서는 지배자나 부유한 상인들이 앞 다투어 학자나 예술가를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를 더욱 촉진시켰다. 돈은 예술을 지배할 수 있지만 예술을 지원할 재력가가 없다면 천재적 재능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부유한 상인들의 예술후원은 보편적인 사실로 문화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메디치가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후원자 가문이다.)그럼, 이렇게 르네상스 미술을 가능하게 한 메디치가는 왜 예술을 후원하였을까? 막대한 돈을 들여 성당을 짓고 벽화를 주문하며 그들의 궁에 신화와 역사이야기를 그리게 한 그들의 실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예술품이 작가의 순수한 창작품이라고 믿던 낭만주의적인 사고의 세계를 뒤로하고 이제 예술은 정치·경제를 포함한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돌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오늘의 관점에서 그들의 후원을 다시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특징을 알아보고 메디치가의 후원의 목적에 은행지점이 전 유럽에 그물처럼 짜여졌다. 피렌체의 통화 플로린(Florin)은 요즘 세계에서 유동되는 달러와 같이 유럽전역에서 통용되는 화폐였으며, 어음과 송금 등이 자유로운 매우 발달된 은행제도가 확립되었다.)모직생산과 무역, 은행업을 하는 피렌체의 가문들은 유럽에서도 손꼽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의 부의 근원은 기존의 교회에서 금하고 있는 이윤추구와 이자소득이었지만, 신흥가문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로 인해 교황과 황제의 돈줄이 되고, 그들 권력이 부침에 따라 신흥가문의 흥망이 교차하였다. 14세기 후반 당시 3~4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립하던 교황분열시대에 메디치가는 그 중 한 교황을 지원하였다. 그가 정식 교황이 되자 15세기 후반의 큰 가문들은 현실생활의 수익에 직접적이고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재정이 튼튼한 그들이 원하는 일은 정치계뿐만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거의 모두 이룰 수 있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인본주의자들과 비잔틴을 버리고 망명했던 일단의 학자들을 옹호했던 메디치가의 코시모는 예술을 옹호하기 시작했고, 오래지않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작은 왕국들의 지배자들도 그를 좇아 이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3. 인간을 찬양하고, 현실 세계를 동경하다.14세기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고전 시대에 번창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도시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은 부유한 상업 도시인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15세기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다.)중세의 문화는 주로 교회 내지는 수도원의 문화로 중세 미술은 글자 그대로 종교 미술이었다. 그것은 신의 나라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고 현세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르네상스 미술은 인간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현실 세계 속에 담겨 있는 스나 로마식의 안정감 있고 균제의 미를 지닌 건축 양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르네상스 사상의 토대가 됐던 주된 변화는 인간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척도’라고 하는 인간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었다. 이러한 자각은 14세기 전체를 거치면서 시인, 철학자, 인문학자들에 의해 고대 세계의 문헌들이 재발견됨으로써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다. 르네상스의 민중들은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은 연구했으며 거기에서 자연과 육체적인 용맹에 대한 존중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런 발견은 기독교도였던 그들이 신의 피조물이라고 간주했던 인간과 자연에 대해 새로운 존중심을 갖게 하였다.신대륙의 발견이나 과학적인 탐구로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진 반면, 종교 개혁으로 인해 교회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르네상스 시기는 신이나 절대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식게 되었고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15세기 르네상스인들의 외적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과학적인 기본 태도는 인간 자신의 표현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중세 교회의 권위에 대해 회의하고 현실적인 삶에 집착하기 시착한 근세 초기의 인간들은 이 지상 위에 삶을 영위하는 자각한 인간의 개별상으로서 종교화 내지 자화상 또는 초상화를 많이 남기게 된다. 그중에서도 이 세기에는 측면상의 형식이 지배적인 것으로 고대에서 발견한 기본 형식을 답습하면서도 자신에 찬 개개의 상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한편, 이러한 개별 인간의 상을 넘어서서 일반적인 또는 이상적인 인간의 상으로서 나체상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신화나 전설 또는 종교적인 주제를 통해 표현되고 있음이 보통이다. 원래 고대 그리스의 나체 조각 이래로 서양에서는 진실되고 아름다운 형체가 가지는 보편적인 비례를 다름 아닌 인간의 나체상에서 찾았다. 이 전통은 중세라는 상징적인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회복된 것이지만 이때에 와서는 고대의 이상적인 형식을 넘어서서 보다 생기 있고 유기적이고 구조적인 인간상상인에게 시민의 지지를 획득하고 대중에게 가문의 위상을 광고하며 교회의 권력을 차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사용되기도 하였다. 많은 베네치아· 밀라노 · 피렌체 등 많은 도시국가가 경쟁하던 당시에 영주나 상인귀족, 주교들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또는 주민들의 단결심을 드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성당과 궁정을 짓고 그 안팎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또한 예술가의 작품, 그 중에서도 회화에 후원자나 그 가족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그려 넣으면서 그를 통해 가문의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는 예술후원을 통해 세속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로서 가문의 수장을 그린 초상화는 차치하고서라도 보티첼리의 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칼을 찬 젊은이로서 묘사된 로렌초의 경우와 고쫄 리가 그린 에 나오는 피에로의 예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또한 로렌초는 공공오락과 축제를 지원하면서 사회와 신뢰와 인기, 명성을 획득했다. 당시 피렌체는 다양한 상인 길드 덕택으로 1년에 노동 일수가 275일에 불과했으며, 여가의 기회가 충분하였기에 사람들은 봄 축제· 사순절 행사 · 성 세례 요한 축제 · 마상 대회 등 여러 가지 오락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시민들의 놀이마당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로렌초는 그 정치적 입지와 시민으로 부터의 지지를 굳건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옛 미술품을 수집하고 작가를 다른 왕이나 귀족에게 소개함으로써 외교의 기반을 굳혔다. 예술의 진가는 사회와 함께 생겨나며 사회생활을 직접적으로 풍부하게 함에 있고, 예술이라는 개념이 문화에 관계되어 문화적이라는 개념으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로렌초의 행동은 예술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사회적 명예와 지지라는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1515년 로렌초의 큰아들인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메디치 가의 권력은 다시 정상에 올랐다. 레오 10세로 이름한 그는 옛 메디치 가의 권위회복과 자신의 정치력을 구축하는 데 건축, 조각, 회화의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고조 할아버지 때부터 후원해오던 산 로생각 할 수 있다. 로렌초의 손녀인 마리아 살비아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대부였던 교황레오 10세가 메디치가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용감하며 가장 신중했던 분의 기억을 되살리자는 의미로 그에게 코지모라는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코지모란 이름을 다시 한 번 피렌체에 등장시킨 16세기의 지배자였다.) 그는 진실로 애호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예술 ?특히 미술-을 지원하였다. 미켈란젤로를 후원하기도 하였던 아카데미아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아카데미아는 코지모1세 당시 두 개로 나뉘어 지식인들을 위한 피렌체 아카데미아와 미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한 디세뇨 아카데미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562년, 조르주바자리가 설립한 디세뇨 아카데미아는 미켈란젤로와 코지모1세를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재능 있는 학생들을 모아 무료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이를 통해 미술을 본격적으로 정치선전에 활용하였다. 피렌체 아카데미아에서 코지모 1세의 칭송 근거를 학문 연구를 통해 찾아내고 성립해내면, 디세뇨 아카데미아에서는 그 내용을 충실히 표현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코지모 1세는 사실 야심에 찬 지배자로서 시민에게 그의 선조들만큼 신뢰받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선대보다 더욱 메디치가의 지배력을 공고히 해 놓았다.)지금까지 약 150년간에 걸친 메디치 가의 미술후원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후원자는 작품에 얼마만한 제약과 영향을 끼쳤을까? 르네상스 시기에 주문자와 작가 사이에서 오갔던 편지나 계약서를 보게되면, 너무 상세하고 많은 제약이 제시되어 있어서 과연 그림의 어느 부분이 작가의 몫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작품이 주문생산되었던 이 시대의 미술에는 주문자의 취향이 작품형성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르네상스 시기에는 현대와 예술을 보는 관점이 판이했는데 이는 예술 후원이 현대의 관점에서 보는 순수한 의도의 예술후원과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게 한다. 현대에는 역사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관상적으로 훌륭한지, 예술성이 현저히 드러나 보는 이에게 얼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