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Ⅰ. 머리말Ⅱ. 개화의 형성Ⅲ. 개화파의 분화1. 온건개화파 - 어윤중을 중심으로2. 급진개화파 - 김옥균을 중심으로Ⅳ. 맺음말Ⅰ. 머리말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봉건체제 모순의 심화와 경제적 위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으로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모습들이 보였다. 우선은 보수인지, 개화인지를 두고 자신이 속해있는 상황과 지위에 따라 개화사상, 위정척사사상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먼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대내적으로는 봉건잔재를 청산하고 경복궁 중건, 호포법을 발포하여 양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서양은 오랑캐와 같다는 생각을 상기하며 외국문물을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조선도 나름대로 근대화를 위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이의 주기론을 이어받은 북학파의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성장한 개화사상이다. 개화사상은 서양을 비롯한 외국문물을 받아드려서 조선의 근대화나 부국강병을 추진할 수 있게 하였다. 개화정책은 당시 유생들의 많은 반발이 빗발쳤지만 영선사파견이나 수신사파견 등으로 진행되었다.비록 쇄국으로 인해 늦었지만 현실에 직시하고 쇄국을 통해서만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인식한 사람들에 의해서 개화를 점차 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3비조라 불리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이다. 그리고 이 3비조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개화파는 나라의 부국을 위해 노력하지만 개화파는 근대적 개혁을 위한 노력 속에서 서구문물의 수용방식과 내용을 놓고 분화하였고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으로 표출되었다. 이 후 개화는 갑오개혁 때 까지 10년 동안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는 3비조를 통해 개화파의 형성 모습을 살펴보고 그들 3비조에 의해 성장한 개화파의 인물 중에 후에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어윤중과 김옥균을 통해서 같은 개화를 가지고 받아들이고도 다른 모습으로 실천하려는 모습을 살펴보며 그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겠다.Ⅱ. 개이지만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양반의 자제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실학파와 개화파의 교량적 인물로 흔히 지칭되는 인물은 박규수(朴珪壽), 강위(姜瑋), 유홍기(劉鴻基), 오경석(吳慶錫)등이다. 이들은 개화운동의 주역들을 지도하였거나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김옥균, 김윤식,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을 지도했으며 박규수의 사후 유홍기가 이들을 이끌었고, 강위와 오경석은 김정희의 문인이고 김정희는 박제가의 문인이다. 박지원, 박제가가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임을 봤을 때 개화사상은 실학사상 가운데 특히 북학파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할 수 있다.환재 박규수는1807년 서울 북부에서 출생하였고 북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박지원의 손자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열렬히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을 전개하고 《양반전(兩班傳)》을 통하여 평등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허생전(許生傳)》을 통하여 중상주의적 경제사상을 펴고 또한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을 통하여 새로운 직업논리를 내세운 실학사상가였다.) 박지원은 박규수가 태어나기 2년 전에 타계하였음으로 직접 가르침은 받지 못하였으나 실학적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하면서 부친 박종채의 가학을 통하여 조부 박지원의 북학사상을 간접전수 받았다.박규수가 활동하였던 시기는 정조 사후 19세기에 등장한 세도정치의 폐단이 국가 기각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고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서양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원군 집정기의 쇄국정책은 능동적 대응책이 아니었다.박규수는 1861년과 1872년에 걸친 두 차례의 연행(燕行)으로 세계인식의 변화가 생긴다. 그는 1861년 청에 사신으로 파견된 후 이미 국제 정세가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대를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서양과 자주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파악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사회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단과 재난과 질병으로 인한 농민항쟁에 봉착하고 있었으며 또한으며 서양의 기술과 무력의 우수성을 실감하였던 것이다.박규수는 서양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또 서양인도 총명한 인물이 있다고 하여 서양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서양인을 오랑캐나 금수가 아니라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양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잘 활용하면 우리도 부국강병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것이 반드시 조선의 손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박규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과거에는 서양인들이 대포를 제조하여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그런데 최근에는중국이 양포를 모방 제조하여 서양인이 이익을 잃게 되었다. 과거에는 중국 상인이 화륜선을 세를 주고 썼기 때문에 서양인이이익을 얻었으나 지금은 역시 중국이 화륜선을 모방 제조하여 다시 세를 쓰지 않아 서양인이 이익을 잃게 되었다.”그의 개국통상론은 당시 조선사회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박규수는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사론을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일본에 대한 개국론은 미국에 대한 개국론과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국부론이었다. 미국은 서양 중에서 가장 부강하면서도 도덕적인 나라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수교의 대상으로 꼽았던 것이고, 일본은 이웃 나라로서 여러면으로 이해가 얽혀있으므로 수교의 대상으로 꼽았던 것이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침략의 위협을 외교적 관계 개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국론은 기본적으로 북학파의 해외통상론을 계승한 것이다. 다만 서구의 도전이라는 새로운 역사 상황에 봉착하여 박규수는 선진 문물의 수용 뿐 만 아니라 국가존립의 외교적 수단을 함께 강구하게 되었다.한국사에서 개화사상은 대체로 개항을 전후해서부터 20세기 초 구국계몽운동기까지의 선각자들의 사상을 통칭하는 광의의 개화사상과 김옥균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형성기부터 독립협회운동 오경석, 김윤식,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를 하면서 개화에 눈을 떴다. ) 또한 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의 집을 출입함으로 개혁에 필요한 배경을 얻게 된다. 어윤중은 개화사상을 일찍 받아들여 후에 자신과 정치활동을 같이 하는 김윤식, 유길준, 민영익 등 온건개화파 뿐만 아니라 개혁의 방법에 차이가 있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와도 교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어윤중은 전라우도 암행어사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을 고종에게 인정받아 조사시찰단에 포함되었다. 조사시찰단은 12명의 간사로 이루어졌으며, 각 개인이 맡은 분양가 있었다. 어윤중이 맡은 분야는 대장성의 업무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윤중에게는 특별히 두 개의 임무가 더 주어졌다. 첫째는 홍영식과 더불어 미국과의 수교에 대비하여 외교사항을 조사하는 임무와 그의 수행원들을 유학시키는 일이었다. 어윤중은 조사 중에 일본의 근대화 인사들과도 교유하였다. 특히 복택유길(福澤諭吉)을 여러 번 방문하여 그의 광범위한 지식에 감동하여 유길준과 유정수를 맡겼다. 그리고 중촌정직(中村正直)과 같은 교육자에게 윤치호를 수학시켰으며 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의 관료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어윤중은 메이지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를 무를 숭상하는 일본국민의 진취적 기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선의 개화, 개혁의 성공은 구습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 현상의 해결책으로 과거제를 폐지하고 연소자들을 해외에 유학시키고, 모를 학교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과 같은 과감성이 없는 이유를 그는 유교에서 찾았으며 유교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종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좋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격물치지와 이국이인을 강구하여 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어윤중은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의 발전상을 체험한 후 근대적인 균, 홍영식, 어윤중, 김윤식, 김홍집 등이 임명되어 개화파가 정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은 개화파의 분리를 일으켰다. 즉, 청의 내정간섭을 벗어나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개화파와 청을 이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온건개화파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김옥균, 홍영식 등은 급진개화파가 되었고, 어윤중, 김윤식, 김홍집 등은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그 후 청의 속방화정책은 급진개화파의 갈등을 일으켰다. 그 갈등은 급진개화파의 퇴조를 불러왔다. 김옥균은 관식에서 사퇴하였고,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로 물러나게 되는 등 세력이 약화되었다. 급진개화파는 자신들의 세력이 약화되어 체제 안에서 개혁이 어렵게 되자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어윤중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안성으로 내려가 있다가 정변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그는 김윤식이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을 평가한 것에 비해 온건하게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에만 비판을 하는 데 그 이유는 대일 조사시찰단의 경험으로 급진개화사상의 정치체제나 경제구상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어윤중은 청을 이용한 실리외교가 민씨척족의 인아거청책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갈등으로 어윤중은 박용효의 아버지 박원양의 시신을 거두어주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그 뒤 중용되지 못하다가 1893년 동학교도들이 보은집회를 열자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로 임명되어, 당시 관료들이 동학도를 비도(匪徒)라 칭하면서 탄압하는 분위기에서 처음으로 동학도를 민당(民黨)이라 칭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주장의 당위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내각과 박정양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이 되어 재정·경제 부분의 대개혁을 단행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붕괴되자 그는 고향인 보은으로 피하고자 했는데, 산송문제로 원한을 품고 있었던 정원로 등의 향반배가 머슴을 동원, 기습하여 피살되었다.2) 급진개화파 - 김옥균을 중심으로김옥균(金玉均)은 1851년 2월에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라는.
홍수전의 통해 본 태평천국운동목차1. 머리말2. 홍수전의 생애3. 홍수전의 종교적 평등사상4. 천조전무제도의 이상과 허구성5. 맺음말1. 머리말19세기 초 서구 제국은 과학 기술의 급진적 발달에 힘입어 상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구 열강은 원활한 생산 원료의 공급과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을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운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만연한 통치 계층의 부패와 과중한 조세 수탈에 반발하는 민중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 때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아편을 중국으로 넘기는 밀무역을 하면서 영국에서 중국으로의 은 유출이 역전이 되면서 반대로 중국에서 영국으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게 되었고 아편이라는 마약 때문에 중국의 사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까지 안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중국과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 혹은 중영무역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아편전쟁으로 청 왕조는 엄청난 군비를 지출하였고, 거기에다 전쟁의 패배로 거액의 배상금까지 지불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 왕조의 관리들은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한 중세 외에도 각종 명목의 세금을 제멋대로 거두어들이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리하여 1841년에서 1849년에 이르는 8년 사이에 백성의 조세 부담은 이전보다 몇 배로 증가하게 된다.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아편전쟁 후 자심해진 아편의 범람과 그로 인한 은화의 해외 유출이었다. 그러나 청 왕조는 전쟁의 패배로 더 이상 아편 금지 정책을 펼 수 없었다. 아편전쟁 후 대낮의 도시에서 아편을 거래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엄청난 양의 은화가 해외로 유출되고, 결국 은 가격이 폭등하고 식량과 농산품 가격이 폭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청 왕조의 제정과 화폐 유통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으며 결과적으로 백성의 실질적 부담은 아편전쟁 이전보다 몇 배나 가중되었다.백성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16세 때 가세가 기울면서 공부를 그만두고 가사를 돌보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때 농민들의 고통스런 생활을 목도하면서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기에 이른다. 그 후 18세 때부터 10여년 동안 서당의 훈장으로서 초빙되어 훈장으로서의 생활 동안 유가사상에 젖어 들었고 유가 사상의 “배우고 여력이 있으면 벼슬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총 4차례의 과거를 응시한 결과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18037년 세 번째 과거 실패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아 발병을 하였는데, 40여 일 동안이나 일어나지도 못하고 실성하여 헛소리를 할 정도였다. 네 번째의 과거를 실패한 후 홍수전은 청조의 과거 제도가 이미 유명무실한 것임을 깨닫고, 부패에 찌든 청조의 통치 행위에 격분한다. 그리고 불우한 자신의 처지와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백성의 고통을 연관시켜 이해하게 된 그는 과거를 통한 출세의 길과 결별한 채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당시 광주 지역은 서구 자본주의와의 접촉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홍수전은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광주를 오가는 과정에서 서구 자본주의와 관련된 일련의 사물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두 번째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광주에 갔을 때 길거리에서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조그만 책자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홍수전이 과거에 연연하던 터라 기독교를 선전하는 서적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네 번째 시험에서 실패하면서 마음이 극도로 공허해진 그는 전에 얻은 『권세양언』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제(上帝)야 말로 참된 신(眞神)이며, 사람들은 모두 상제의 자녀로서 피차간에 모두 평등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모두 마땅히 상제를 숭배하고 귀신이나 각종의 다른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설교에 이끌려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이 때부터 구시대의 관념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 홍수전은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여 탈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을 토로하며 밝은 미래를 그려내고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특히 남녀의 평등까지 주장함으로써 당시 농민들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다시 『원도각세훈』을 써서 농민들의 힘을 빌어 사악한 청 왕조의 통치를 종식하고 모든 사람이 억압과 수탈 없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홍수전은 광서성 지방에서 풍운산(馮雲山)과 함께 ‘배상제회’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혁명적인 성격상 지배 세력의 압박과 통제는 당연한 것이지만 오히려 이런 압박과 통제로 인해 농민들의 혁명 열기는 더욱 달아오르게 할 뿐이었다. 게다가 1849년부터 1859년에 걸쳐 광서성 지방에 대대적인 기황(饑荒)이 발생하자 곳곳에서 소규모의 봉기가 일어나자 이 기회에 청 왕조를 종식시키려 1850년 7월 ‘배상제회’ 회원 모두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태평천국군의 초보적 편제가 마련하고 무장 봉기가 시작한다. 청 왕조는 이러한 혁명적 기세를 초동 단계에서 잠재우기 위해 병사와 장수를 보내 자형산 지역의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 토벌에 힘썼지만 관군의 공격은 ‘배상제회’의 대응으로 모두 실패하였다.1851년 1월 홍수전은 정식으로 ‘태평천국 원년’을 선포하고 같은 해 3월 자신을 천왕이라 칭하고, 9원 영안성을 공략하여 봉건 왕제를 실시하고 1853년 남경을 공격하여 마침내 남경을 천경으로 고쳐 부르며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홍수전은 천경에서 태평천국의 새로운 정책인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를 반포한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가 식어가고 북벌 또한 실패하면서 천군의 공세가 심화됨에 따라 태평천국군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농민 군중을 결집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지도자들 사이의 정치적 반목과 대립으로 상호간에 살육전이 벌어져 태평천국군의 힘이 절대적으로 약화되면서 태평천국은 쇠망의 길은 걷다가 1864년 6월 홍수전의 사망과 함께 바로 천경이 함락되고 태평천국의 혁명도 끝이 난다.3. 홍수전의 종교적 평등사상홍수전은 기를 구분하지 않고 신분을 뛰어넘어 모두가 평등하게 함께 모시는 대공부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신분이 낮은 농민의 상제로서, 귀족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지배 계층의 상제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종래의 봉건 황제들이 상천을 그들의 전유물로 삼아 온 잘못을 질책하면서, “반고 이래 삼대에 이르기까지 군민 모두는 한결같이 황천을 받들었다. 그 때 왕은 상천을 숭배하고 제후?선비?서민까지도 모두 그러하였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인간 세상에서 자식이 아버지를 섬길 때 어질고 못난 자식의 구분이 없이 모두『예기(禮記)』의「내칙(內則)」을 따라서 하는 것과 같다. 천인(天人)은 일기(一氣)로서 리(理)또한 둘이 아닌데 어찌 오직 군주만을 받들어 모셔야하는가”라고 반문하여, 세상사람 누구나 상제의 자녀인 만큼 군주만을 황제 또는 천자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또한 그는 황제뿐 아니라 군벌?관료?지방의 토호 및 유지 같은 통치 계급과 그들이 조성한 각종의 우상, 그 우상을 선양하는 승려?도사들까지를 포함한 일체를 ‘염라요’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지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마땅히 모두 함께 이 요괴를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즉, 염라요인 봉건 통치 세력을 물리칠 것을 강조하였다. 홍수전이 창도한 상제의 자녀들이 “하늘을 받들어 요괴를 물리치는” 투쟁이란 종교 형식으로 포장된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거기에 공자까지도 요괴로 보고 있다.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모든 서적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잘못이란 공자와 그 신도들이 오직 봉건 계급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군자와 야인으로 나누어 군자는 야인을 다스리고 야인은 응당 군자를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유가가 주장하는 ‘삼강오륜’은 결국 한쪽의 일방적 복종을 강요하는 것으로, 남녀 혹은 빈부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군분이 흩어져 만 가지 것이 되는’ 상제의 사녀로 보고 있지 의 참된 도를 숭경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영혼이 상천을 접견한 후부터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커다란 바람이다.이것은 만주인들이 상제의 뜻을 거역하고 침략의 죄악을 저질렀음을 통렬히 비난한 것이며, 동시에 외국의 침략자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홍수전은 민족 간의 침략을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반봉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홍수전이 주동을 하여 일어난 태평천국은 기독교 교리를 이용하여 민중운동으로 온갖 입제 속에서 강탈당해 왔던 인권을 절대적 권위인 상제와 하늘의 위세와 계율을 바탕으로 통치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보장받기를 원하는 백성들을 대변한 것이었다.4. 천조전무제도의 이상과 허구성태평천국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는 홍수전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는 가장 먼저 토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한 결과 ‘천조전무제도’를 수립하였다. 홍수전은 이 제도의 취지를 천하의 전답을 만민이 공동으로 경작하고 흉작인 전답이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풍작을 옮기면 흉작을 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음식을 함께 먹으며 옷도 함께 입고, 돈 역시 함께 사용하며, 모든 것을 균등하게 한다면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은 사람들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그런데 이는 지극히 이상적으로 설정된 하나의 공상 사회에 불과한 것으로, 구체적 시행 방안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사실상 이것은 모든 토지가 상제의 소유임을 선포하고 그 동안 지주들이 소유했던 토지를 몰수하여 모든 농민이 함께 공동으로 경작하는 토지 국유제를 시행하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경장 농지의 다과에 따라 이주시키고 농작의 풍흉으로 발생하는 기근을 수확물의 소통을 통해 구휼한다는 구상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방안일지 몰라도 실제로 시행함에 있어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착수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또 토지의 공동 경작 문제에서도 ‘천조전무제도’에서는 가족의 수에 따라 남녀 구분이 없음을 하는 데 여기에서 그렇다었다.
신라 법상종-태현계와 진표계를 중심으로-목차1. 머리말2. 법상종의 전래와 수용과정3. 태현의 법상종의 성립과 신앙(1) 태현의 법상종의 성립(2) 태현계 법상종의 신앙4. 진효의 법상종과 신앙(1) 진표의 생애(2) 진표계의 법상종 성격5. 법상종의 변화6. 맺음말1. 머리말법상종은 통일신라 때 성립된 불교 종파로 '대각국사묘지(大覺國師墓誌)'에 보이는 여섯 학종 중의 하나이다. 법상종에 대한 연구가 독립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37년 김영수의 논문 〈五敎兩宗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법상종은 신사시대에 성립한 오교의 하나로 진표에 의해 확립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신라불교를 종파를 초월한 총화불교로서 연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후 김영태의 논문 〈新羅 占察法會와 眞表의 佛法硏究〉에서 진표를 법상종이 아닌 점찰교법의 창시자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나타났다. 그러나 반면 오교(五敎)로 성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불교미술분야에서 나온 것으로 법상종의 甘山寺 彌勒阿彌像과 그 명문을 분석하면서 법상종의 성립을 논한 문명대의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甘山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와 법상종의 신앙형태에 입각하여 그 성립을 논한 김남윤의 〈新羅 中代 法相宗의 成立과 信仰〉것들이 있다. 특히 김남윤의 논문에서 법상종을 태현계 법상종과 진표계 법상종으로 나누어 태현을 법상종의 한 계통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외, 태현에 대한 연구와 순수불교학적인 관점에서의 법상종 연구논문들이 있다.모든 존재란 허상에 불과하며 마음의 작용인 식(識)이 연기(緣起)하여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유식론(唯識論)을 바탕으로, 허무한 존재 보다는 현상을 상세하게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둔다. 유식종(唯識宗)·유가종(瑜伽宗)·유상종(有相宗) 등으로 불린다.중국 당(唐)나라 때 인도로부터 새로운 유식교학(唯識敎學)을 들여온 현장의 문하에서 일어났다. 659년 현장에 의해 번역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바탕으로 삼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원측이 현장에서 유식을 같이 전수 받으면서 규기와 함께 커다란 학식을 갖추고 규기와는 다른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였지만 중국인이 아닌 신라인으로서는 중국법상종의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단시되었다. 이 원측의 유식은 전체적으로 한가지만을 고집하고 않고 두루 통하는 일승적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는데, 이것이 규기파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원측이 규기와 같이 현장에게 유식사상을 전수 받았음에도 규기와는 다른 사상을 확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현장에서 비롯된 불전의 신역시대 이전에 이미 구역을 통한 유식과 접촉하고 있었고, 상당한 경지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측의 유식사상의 도증과 태현으로 이어지면서 신라에 전래된다.원측의 유식사상을 신라로 직접 전수한 이는 도증인 것으로 보여진다.)‘梵網經古迹記下卷補忘抄’ 권1에현장의 3천 문도 가운데 70인의 달통한 제자들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으뜸이었던 원측법사의 門弟인 道證의 제자가 바로 그다. 태현은 처음에는 화엄을 배우고 그 뒤에 법상을 익혔다.라고 한 것에서 도증이 원측의 제자이고 태현이 도증의 제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도증에 대해서는 《三國史記》8 효소왕 원년 그가 천문도를 바친 기록과 월광사 원낭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에 원광사는 신승(神僧) 도증이 창건하였다는 기록밖에 없어서 도증의 모습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신라의 법상종의 성립과정을 태현을 통해서 살펴보는 수 밖에 없다.하지만 그 전에 경흥(憬興)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흥을 태현에 앞서서 활약한 법상종계 승려로 보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경흥은 확실하게 누구에게 학통을 이어받았는 지는 확인되지가 않아서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다. 다만 경흥이 남긴 방대한 저술들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경흥은 서술함에 있어서 어느 특정 종파나 특정인의 사상을 따라간 것이 아닌 독자적인 자신여 《金光經》을 강하여 기우를 하게 하교, 다음 해에는 화엄승인 법해를 불러들여 법력을 시험하고 있다. 우선 태현을 보면 경덕왕대에 활동하였던 모습의 일연을 『三國遺事』 권4에 기록하고 있다.景德王 天寶 十二年 癸巳(753)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그때에 왕의 첨함을 받아 왕궁에 들어가서 《金光明經》을 강설하여 비를 빌게 되었다. 어느 날 점심공양 때에 발우를 펴고 오래 기다렸으나 물을 가져오는 것이 늦었으므로 감독하는 관리가 늦은 이유를 따져 물으니 물을 가져다 받드는 사람이 변명하기를 ‘궁성 안의 우물이 말랐으므로 멀리까지 가서 길어 오느라 늦었습니다’ 함을 태현이 듣고 ‘어째서 그런 일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오후에 경을 강설할 즈음에 행로를 받들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를 한참 만에 우물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데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게 솟아 올라가는 모양이 마치 刹幢과 같았다.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이일로 인하여 그 우물을 金光井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경덕왕대에 활약하던 모습을 볼 수 있고 화엄승인 법해의 사료를 보면이듬해 갑오년(754) 여름에 왕은 이번에는 법해(法海)대덕을 황룡사에 청해다가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친히 가서 향을 피웠다.왕은 조용히 법해에게 말했다.“지난해 여름에 대현법사가 『금광경』을 강하니 우물이 일곱 길이나 솟아났소. 이분의 법도(法道)는 어떠하오?”“그것은 아주 조그만 일이온데 무엇을 그렇게 칭찬하십니까? 즉시 창해(滄海) 물을 기울여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떠내려가게 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왕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하는 말로만 여겼다. 오시에 경을 강할 때, 향로를 당겨 잠잠히 있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문득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궁리(宮吏)가 뛰어와서 보고했다.“동쪽 못이 벌써 넘쳐서 내전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왕은 넋 나간 듯이 멍하게 있었다. 법해는 웃으면서 아뢰었다.“동해 물이 기울어 쏟아지려고 수맥이 먼저 넘친 것입니) 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깨끗이 만들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여 인연 있는 중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사(月明師)가 밭두둑(1871) 으로 난 남쪽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짓게 했다. 월명사는 왕께 아뢰었다.“빈도(貧道)는 그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향가만 알 뿐이오며 범성(梵聲)(1872) 에는 익숙지 못합니다.”왕은 말했다.“이미 인연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 하더라도 좋소.”월명은 이에「도솔가(兜率歌)」를 지어 사실을 진술했는데, 그 가사는 이렇다.오늘 이에 산화가(散花歌)를 불러뿌린 꽃아 너는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셔라지금 세간에서는 이것을「산화가」라고 하나 잘못이다. 마땅히「도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산화가」는 달리 있는데 그 글이 번거로워 기재하지 않는다. 조금 후에 괴변이 즉시 사라졌다.왕은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차(品茶)(1875) 한 봉과 수정 염주 1백8개를 내주었다.)왕의 명령에 따라 명랑은 향가를 지어 도술천의 미륵보살에게 비는 모습을 통해서도 명랑이 미륵신앙자인 것을 수 있다.정치 권력과의 관련과 지배세력의 후원이 없이는 종파의 형성과 교단의 유지를 위한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질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태현이 활동하는 시기인 경덕왕대에 미륵신앙이 왕의 권위와 통치를 도와주는 역할로 두드러졌다는 사실을 주목하면 태현에 와서 법상종의 종파의 형성과 교단의 확립을 확인할 수 있다.(2) 태현계 법상종의 신앙태현계 법상종의 신앙은 바로 미륵?아미타정토(彌勒?阿彌陀淨土)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태현 이전부터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법상종에서 미륵은 신앙의 중심으로 釋迦牟尼拂(석가모니불)의 수기를 받아 이 세상이 악토(樂土)로 되고 전륜성왕이 다스린다고 하는 미래 세상에 태어나서, 성불을 하여 현세에 화도(化度)되지 못한 중생들을 용화수하(龍華樹下)의 삼회의 설법으로 모두 다 제도하 까맣게 잊어버렸다. 다음해 봄에 사냥을 나갔다가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듣고, 문득 지난해 일이 생각나 가보니 개구리들이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었다. 진표는 탄식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고는 출가하여 계법(戒法)을 구하기로 하고 12세에 금산사(金山寺) 숭제(崇濟)에게 가서 배움을 청했다. 숭제는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전하고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미륵보살·지장보살 앞에서 참회를 하고 간절히 구하여 계를 받아서 세상에 유전하게 하라고 했다. 명산을 돌아다니다가 변산 부사의암(不思義庵)에서 3업을 닦으며 삼칠일 동안 기도하여 지장보살의 현신수계(現身援戒)함을 얻고, 다시 영산사(靈山寺)에 가서 전처럼 기도하여 미륵보살에게서 《점찰법(占察法)》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받았다. 그 뒤에 금산사를 중창했다. 경덕왕이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시주하자 그것을 여러 사찰에 나누어주었다. 그 뒤 금강산에 가서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여 7년 동안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부사의암에 돌아갔다가 고향으로 가 부친을 뵙고, 진문(眞門) 대덕방(大德房)에 있었다. 속리산의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찾아와서 계법을 간청하자 가사(袈裟)·발우(鉢盂)와 《공양차제비법》·《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業報經))》 및 간자 189개를 주며 교법의 유포를 부탁했으며, 속리산의 길상초(吉祥草) 나는 곳에 길상사를 창건하게 했다. 발연사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죽었는데, 제자들이 그대로 두고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지자 비로소 흙을 덮고 돌을 세워 표시했다. 비교적 《三國史記》,《宋高僧傳》 등 많은 기록이 남아 있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게 살펴 볼 수 있었다.(2) 진표계 법상종의 신앙진표에 의해 확립된 점찰계법을 먼저 살펴보겠다. 점찰법이란 나무를 깍아 만든 점대를 굴려서 점을 치는 것으로 던져 나온 결과에 따라 참회법을 수행하는 것이다. 《점찰경》은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
목차1. 머리말2. 태현법사의 생애1) 태현의 생애와 수학2) 태현의 법상종의 성립3. 태현법사의 사상1) 태현의 저술2) 태현의 유식사상4. 맺음말1. 머리말삼국시대 신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고구려, 백제 다음으로 불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지만 고구려, 백제에 버금가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신라의 불교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삼국통일 시기에 입당유학을 하지 않고도 방대한 저술과 화쟁사상으로 당대의 명승으로 이름을 알린 원효대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한명의 고승으로 역시 입당유학을 하지 않고 원효대사 다음으로 방대한 저술을 남긴 태현법사가 있다. 태현법사는 경덕대왕(742~764)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승려이다. 그가 남긴 저술을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게도 전해지면서 중국과 일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록 입당유학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저술만으로도 신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 그의 사상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 있어서도 다른 고승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의 사상은 유식사상을 비롯한 여러 불교사상들을 섭렵하여 원효와 마찬가지로 통불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저술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이런 태현법사의 연구는 1980년 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현법사에 대한 연구는 크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김남윤의 논문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의 성립과 그 신앙」에서 대현법사에 내용이 포함된 논문이 발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의 채인환의 신라의 대현법사연구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연구가 그나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에서 시리즈로 나온 논문은 신라 대현법사연구 (Ⅰ)행적과 저작(著作), 신라 대현법사 연구 (Ⅱ) - 대승계학 (大乘戒學), 신라 대현법사 연구 (Ⅲ) - 계율사상 - 등이다. 마찬가지로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일본 법상관계 제소에 인용된 태현법사의 유식사상」이 나오면서 대현법사에 대한 행적이나음에는 화엄을 배우고 그 뒤에 법상을 익혔다. 항상 자취를 심기는 생활을 하였고 거문고 타기를 즐겨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밖으로는 덕행을 숨기고 안으로는 밝은 지혜를 지니고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처음부터 그가 법상을 수학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숨어서 지내지를 즐겨했다는 것이다. 왜 처음 화엄을 공부하다가 법상으로 바꾸었는지, 높은 덕행을 가지고도 숨어서 지녔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앞서 말한 출신 신분과의 연관이 있을까 생각한다. 처음 출가를 할 때 화엄종으로 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 사회에서 화엄종은 엘리트들 즉, 왕족이나 귀족들이 많이 출가하였으므로 높지 않았던 자신의 신분을 가지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란 깨기 어려운 벽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원측과 도증을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법상이 새로운 불교사상으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로 태현이 수학하기에는 오히려 그 쪽이 자신의 상황에서 공부하는 것에 맞을 수 가 있었다. 화엄이 아닌 법상을 공부한다면 신분으로 인하여 부딪치는 문제들을 피할 수도 있으면서 새로운 불교사상을 접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한 숨어서 지내기를 즐겨하는 까닭 역시 원효와 마찬가지로 높지 않은 신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란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차라리 숨어 지내면서 많은 저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경덕왕대에 활동하였던 모습의 일연을 『三國遺事』 권4에 기록하고 있다.景德王 天寶 十二年 癸巳(753)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그때에 왕의 첨함을 받아 왕궁에 들어가서 《金光明經》을 강설하여 비를 빌게 되었다. 어느 날 점심공양 때에 발우를 펴고 오래 기다렸으나 물을 가져오는 것이 늦었으므로 감독하는 관리가 늦은 이유를 따져 물으니 물을 가져다 받드는 사람이 변명하기를 ‘궁성 안의 우물이 말랐으므로 멀리까지 가서 길어 오느라 늦었습니다’ 함을 태현이 듣고 ‘어째서 그런 일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오후에 경을 강설할 즈음에 행로를 받들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해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그 잘못된 점을 판정한다는 사실로 볼 때 자신만의 불교사상이 확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하여 태현은 스스로를 ‘靑丘大師’라고 일컬었는데) 靑丘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지역과 분파를 넘어선 개념이다. 태현법사가 한쪽으로 치우진 불교사상을 공부한 것이 아니고 여러 불교사상을 섭렵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자신 스스로를 청구대사라고 칭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보아 태현의 불교세계는 다른 어떠한 승려보다도 확실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그는 후세에 ‘新羅瑜伽祖 大德大賢’이라고 尊稱되었듯이 국내 그리고 국외의 大德先師들이 法相에 관하여 밝히 義旨를 널리 여러 저술에서 집성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신라 유가연구의 기반을 세웠고, 그 문하에는 檜巖?雲卷?별巖 등의 제자가 배출하여 그의 법통을 계승하였다.)淸算이 지은 梵網經上卷古迹記網義의 第一에태현이란 소주의 휘명이다. 이조에서는 율사?선사?법사의 삼사호를 세우며, 이는 법사의 호이니, 종요의 서에 ‘태현법사’라 칭호하고 있는 때문이다. 연사의 기에 이르기를 ‘태현은 신라국인이며, 오직 자국에서만 불법을 선한 까닭에 고승전 가운데에는 이 스님이 나와 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文은 당국에도 전통하고 있으니만치 신라의 순경?의상과 같이 승전에 실려져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당 대천복사의 도봉법사는 序를 製하여 현사가 撰한 바 諸文의 首에 冠하였고, 그러므로 ‘菩薩戒本宗要’의 首에도 안하였다. 또 멀리서나마 법사의 행업을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백에 응하여 傑起함은 그 누구인가 곧 동국의 태현법사야말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취를 숨기로, 만남을 멀리하였다.‥‥.”고 하였으니, 그가 승전에 실리지 않은 것은 작용을 숨기고, 광명을 들어내지 않았던 까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보면 태현법사는 신라에서만 활동하였지만 그의 저서는 당으로까지 나가서 많은 다른 승려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볼 으로 생각된다.)그리고 신유식으로 불리는 유식사상을 접한 승려는 順璟이나 義寂도 접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어서 圓測이 입당유학을 해서 道證에게로 신유학이 전수되어지고 다시 孝昭王 원년에 귀국한 道證에 의해서 太賢에게로 신유식은 전수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한쪽에만 치우친 학문을 하지 않았던 태현은 사상적으로 護法 正宗의 입장에서 圓測과 窺基의 유식학을 회통하여 자신의 유식학을 확립하여 法相종조로 받들어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그래서 태현은 신라 불교학의 바탕에서 신유식 사상을 받아들여 그때까지의 불교학을 종합한 인물이 된다. 그의 불교학의 광범함과 신유식 중심의 교학에서 태현은 법상종의 대표적 인물이 되며 또한 교학 연구에 치중하는 유식학승들을 이끄는 법상종 교단의 조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선 태현이 유가조로 불리웠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 호칭이 당대에는 불리지 않았다 하더라고 1세기 가량 후인 崔致遠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어 신라 하대 이전부터 불리워졌다고 보인다.) 瑜伽란 불국사에 表訓?瑜伽?圓測의 三聖講院이에서 나오는 瑜伽로 태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그가 佛國寺에 거주하면서 강학을 하였다고 하니 유가란 태현을 가리키는 말로 법상종의 종조임이 확인할 수 있다.앞서 三國遺事에 실린 내용으로 미륵불의 주의를 돌기를 좋아하였다는 구절을 통해서 태현이 독실한 미륵신앙자임을 알 수가 있다. 왕실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아미타신앙이 널리 신앙되었던 신라중대 사회에서 태현이 활동하였던 경덕왕대에 미륵신앙 관계의 나타난 모습을 보면 법상종의 당시의 상황도 추측할 수 있다. 비록 미륵신앙과 관계되어 법상종의모습을 나타내주는 사료는 없지만 신라중대 사회의 왕실에서 아미타신앙이 주가 되었던 것과 달랐던 모습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경덕왕대에 미륵신앙이 국가적 문제의 해결과 국왕의 통치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미륵신앙을 행하는 교단에 대한 국가의 인정과 아울러 법상종의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하였던 사실을 보여주는 한 학파에 대하여서든지 극히 공평한 처리를 한 것은 그 태도에 있서 三論宗과도 같고 禪宗과도 같다. 대사는 강적인 慈恩?惠沼의 설이라도 取할것은 취하고 棄할 것은 기하고 계사인 원측?도증의 학이라도 跛할 것은 파하고 立할 것은 립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원측의 학설을 讚하고 어떤 경우에는 타인의 해석을 찬하여 학문상으로는 일점의 정사관계와 파벌문제에 인순하지 아니 하였으니, 이 태도가 신라사상의 조율이며 특징이고 태현의 唯識釋義는 慈恩과 圓測의 兩派異說에 대하여 장점만 종합한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태현은 어느 한 학파 혹은 학문에만 얽매이지 않고 필요한 것과 버릴 것을 과감히 정하여 취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태도와 마찬가지로 그의 저술에 있어서도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대략 50여 종에 이르는 저술들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기반이 되겠지만 남아있는 것은 5종에 지나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다음 표는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에서 나눈 목록으로 태현의 저술목록을 유식학과 명인 관계의 저술과 그 밖의 다른 분야에 대한 저술에 대한 것으로 나누었다. 표 1에서는 《華嚴經》을 비롯한 대승경전과 如來藏?中觀思想의 論書에 대한 저술, 그리고 戒律과 淨土敎學 관계 저술이 있다.)먼저 대승 경전에 대한 저술 가운데는 般若經典 계통이 6종으로 가장 많다. 《華嚴經》,《法華經》,《涅槃經》 등은 당의 신역 이전부터 중국 불교사에서 중시되어 온 경전들이며 신라에서도 널리 연구된 경전들이다.) 다음으로는 如來藏 계통에 속하는 《起信論》과 중관사상 논서인 《掌珍論》에 대한 저술이 있고 계율에 대한 저술은 3종이 있다. 마지막으로 정토교학에 대한 저술은 9종으로 태현의 불교학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이 보인다.다음은 태현의 유식학 관계 저술목록을 살펴보겠다.唯識思想 관계 저술은 초기부터 후기 유식에 이르는 論書들 20종에 대한 저술이 있다. 그 중 無着의 저술에 대한 주석은 3부가 있으며 世親의 저술에 대한 주석은 8종.
처음 긍정 심리학이란 책을 읽기 전에 들었던 생각은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 책이었다. 하지만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긍정적 정서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 활용할지를 어느 정도로 잘 알려줄지에 대한 기대감 같았다. 정신건강 수업시간에도 많이 들었던 긍정적 정서라는 것은 나에게는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수업을 들으면서도 내가 확신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즉 아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낙관적이기 보다 비관적이며 앞날에 부정적인 걱정을 늘 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22살 얼마 되지도 않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기억 속에 가장 기뻐했던 일을 떠올린다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때는 운동을 잘해서 6학년 내내 거의 도에서 일위한 기억과 중학교 때는 운동을 그만두고 성적이 급상승한 일, 고등학교 때는 다행이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고, 대학교에 와서는 지금은 남자친구를 만난 일이 나에게는 행복이며 긍정적인 정서를 만들 수 있는 기반들 중 한 요인인 것 같다. 아마 아빠는 나에게 늘 얼굴이 못 생겼다거나 운동을 할 때는 일위를 하라는 압박을 크게 주었으며, 시합이라도 망치는 날에는 바보니 어쩌니 하면서 많은 구박을 했다. 또 어쩔 수 없이 운동을 그만두었을 때는 학원을 보내주는 대신 성적을 올리라는 압력을 주었다. 다행이 고등학교 2학년이 넘어가면서 아빠도 나에게 많은 주문을 하거나 압력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빠의 뜻에 알아서 행동했기도 했으며 나도 성인이 될 날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빠에게 받은 압력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잘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외모로도 난 늘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다녔으며, 운동을 할 때에도 나는 소질이 없는 짓을 괜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공부를 할 때도 내가 열심히 해서라기보다 학교친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내 성적이 올라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입시를 앞으로의 인생을 밝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딱 맞는 책이 아니라는 것은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나만을 생각해서 써주었으면 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지금부터라도 행복하게 살아보려면 나에게 있는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아야 하는 데 이제까지 모르고 지냈던 것을 갑자기 알아보려고 하니까 막상 떠오르지는 않지만 아마도 사회성이 가장 뛰어나지 싶다.그것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보 적은 없으나 빵집이나 편의점에서 해 본 결과, 내가 생각 했던 것 보다 사람들을 겁내지 않고 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엄마는 나에게 혼자서 자라온 네가 손님들을 잘 받을 수 있겠냐는 걱정을 하면서 말렸지만 그때 당시에는 내가 학교 안에서 불법으로 신입생들을 속여서 판 토익 책값을 물어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형편이어서 나도 걱정은 앞섰지만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한 이주간은 고생했지만 그 뒤로는 손님이 들어오고 계산을 하고 나갈 때까지 상냥하게 말하는 나를 보고 있자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웃으면서 “어서오세요”를 하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인사 해주시는 손님이 좋았고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재미있기도 하였다. 내가 웃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친구들이 나를 보고 화난 사람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일 때문에 웃는 경우가 생기니까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음으로써 일을 하러 오기 전에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이 일이 끝나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런 것을 떠올려 보니 난 아마도 사회성이 강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끌어내고 그렇게 믿고 행동하면서 정말로 긍정적인 정서의 효과는 크게 나타나는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만 짜증이 날만한 일이 생기거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엄마에게 또는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화는 내며 내가 내 스트레스 때문에 반찬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도 왜 그랬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럼 남자친구가 R.O.T.C 모임이 있어서 늦게 끝나 술마시고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믿고, 또 엄마의 경우는 저녁에 식당에 일을 하러 나가셔서 바쁜데도 나를 위해서 저녁을 해 주시는 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나를 수긍하게 만들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런 것이 시작 단계라서 나도 모르게 본래의 성격인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나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스트레스는 덜 받는 것 같다. 정말 긍정적 정서의 효과를 실감하고 더 실감하려고 노력중이다.앞에 잠깐 말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는 게 나의 커다란 약점이었다.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특히나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고 아빠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같이 운동하는 나보다 어린 후배들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푸는 경향이 있었고 또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가 운동을 그만두고 학교 친구들을 사겨야하면서 이런 화를 함부로 내지 못하게 되자 엄마에게만 하다가 대학 와서 만난 남자친구에게 넘어갔다. 고쳐야지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성격은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친부모에게서 받은 것을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내 자신이 스스로에게 창피해졌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나를 받아주신 엄마와 또한 그리 잘난 것 없는 나를 받아주는 남자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 수업시간에 배웠고 또 책에서도 나오는 것을 이용해 보았는데 역시 효과가 있었다. 사고가 생기고 신념에 따라 결론이 나오지만 반박을 해서 대안을 찾는 다는 아주 좋은 기술이다. 이것을 쓸데없는 일에 화를 잘 내는 나에게 써먹으니 남자친구에게 불같은 화를 내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생각하는 시간 때문에 혼자 입을 다무는 시간이 좀 생겼다는 것뿐이다. 역시 앞으로의 미래의 위해서 난 이 약점을 계속 고쳐나가야겠다는 다 노심초사는 커녕 시험기간에도 뮤지컬을 보는 모습을 보이는 이 친구를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험기간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시험 점수를 보고나서 나에 대한 실망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주동안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하기 싫은 공부로 억지로 하는 내 점수와 거의 똑같이 나와서였다. 어떻게 이주동안 공부를 한 나와 시험보기 하루 전에 공부한 그 아이와 같은 점수가 나온다는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문득 내 자신이 너무 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운동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나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하기 싫은 연습이나 공부 후에 시합 혹은 시험을 볼 때 오히려 내 머릿속에 어지럽고 하는 것을 떠올릴 때 왠지 내가 너무 나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번 학기부터 그 아이를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비록 시험 하루 전에 공부하면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 못하지만 공부를 하면서도 급박한 마음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번 중간고사는 대학에 들어 와서 공부를 하지 않는 학년인 일학년 때를 빼고 처음 있었던 일이다. 내가 공부한 만큼 점수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목표를 심하게 크게 잡지 않으니까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 같이 이런 쓸데없이 노심초사하는 친구가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다.비록 내가 과거에 대한 만족이 크지 않았지만 현재부터라도 행복해지고 싶다. 그 중 한 가지가 앞서 계속 말해온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미래에는 보다 나은 행복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리라 본다. 역시 책에서 사랑할 줄 아는 능력과 사랑 받을 줄 아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데 이제까지 사랑을 제대로 받을 줄도 할 줄도 모르고 사랑을 하고 있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서 난 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아이와 사귀게 되었으나 같은 과였던 지금의 남자친구와 친해지면서 난 속으로 언젠가 이 친구와 사귈거라는 당치도 않는 느낌을 가지고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뒤 정확히 3달 후에 지수업들 때문에 휴학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고 하기 싫은 과제를 그 친구가 많이 해주면서 의존적인 모습에서 더욱 발전해 난 정말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해왔던 습관을 또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으면서 그 친구를 함부로 대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과 친구들이 너무할 정도라고 했으니... 가끔 싸우는 일이 있으면 내가 잘못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남자친구가 사과하는 경우가 많거나 내 화를 풀어주려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금 되새겨보니 정말 내가 남자친구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나 싶다. 지금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면 역시 고쳐야한다. 책에서 나온 예 같은 경우는 없지만 대화를 할 때 그 친구를 무시하는 말을 삼가고 없는 애교도 살짝 부리고 싶다. 현재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2년이 넘는 시간을 만나고 있으니까 지루한 면도 생기기도 하니까 내가 변화를 주면서 이제까지 했던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고치면 사랑받을 능력이 조금은 더 커지고 역시 내가 사랑할 줄 아는 능력도 커지는 것 같다. 주변에 친구들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난 그런 사랑 보다는 현재 나를 사랑해주고 있는 사람에게 충실하고 싶다. 이성에 눈을 뜨는 시기라는 사춘기 무렵에는 나의 외모 때문에 난 남자친구 조차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를 이렇게나 많이 좋아해주고 아껴주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자신감을 준 남자친구를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어렸을 때 아빠에게 받은 많은 중압감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도 한 번의 반항 없이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된 것은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 때문이다. 엄마는 아빠와는 반대로 공부에 대한 압박이나 운동을 할 때도 네가 좋으면 하라는 식이었지 한 번도 무엇을 해보라고 하지도 기대를 크게 보이지도 않고 내가 잘하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엄마였다. 지금 생각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