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문화를 통한 종교 현상 - 소녀시대를 중심으로 - 소비자아동학부 2008-13094 이보한 소비자아동학부 2008-13096 이성희- 팬 - 1. fanastic 의 준말 . 2. 라틴어의 ' fanaticus ' 에서 유래되었다 .(Jenkins, 1992) 3. fanaticus 라는 단어는 본래 사원의 소유물 또는 사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신도를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으나 , 후에 그 의미가 종교적 신념의 과도한 형태 , 과장되고 잘못된 정열이란 의미로 변하게 되었다 . - 팬덤 - 1. ' 광신자 ' 를 뜻하는 ' 퍼내틱 (fanatic)' 의 팬 (fan) 과 ' 영지 · 나라 ' 등을 뜻하는 접미사 ' 덤 (- dom )' 의 합성어이다 . 2. ' 퍼내틱 ' 은 라틴어 ' 파나티쿠스 ( fanaticus )' 에서 유래한 말로 ,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 3. 최근에는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거나 몰입하여 그 속에 빠져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Similar? Different?▣ 현대 사회에서 종교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기존의 제도종교로부터 “예상치 못한 곳들 (unexpected places) ” 로 옮겨가고 있다는 종교사회학자들의 주장 ( Wuthnow , 1992) ▣ 제도 및 기관으로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는 사회적 맥락이 수반하는 종교의 사사화 (privatization) 및 개인화 (individualization) 는 종교적 의미생산에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주관성 (subjectivity), 자율성 (autonomy 등의 특성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디어와 대중문화는 개인의 종교적 의미생산을 위해 중요한 문화자원이 된다는 것이다 .(Forbes, 2000)로버트 피시그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틸레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를 존경하며 , 믿고 , 접촉을 갈망하는 것 .니니안 스마트 종교를 구성하는 8 번째 요소는 ‘ 경제 ’ 의 차원 .“ 돌 ” 은 많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ex. 연금술사의 ‘ 철학자의 돌 ’) 과거 연금술사들은 깊은 수련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일깨우고 , 그 수련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 소녀시대 『 The Boys』 M/V 분석“ 비둘기 ” 는 자유를 상징한다 . 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닌 스스로 자유를 찾아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소녀시대 『 The Boys』 M/V 분석The Boys 의 도입부에 나오는 ‘GG’ : Girl’s Generation 이라고 보기도 하나 하나님 혹은 우주의 절대 신인 ‘God’ 를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소녀시대 『 The Boys』 M/V 분석전 세계가 너를 주목해 위풍도 당당하지 뼛속부터 넌 원래 멋졌어 너의 집념을 보여줘 지구를 좀 흔들어줘 모두가 널 볼 수 있게 역사는 새롭게 쓰여지게 될 걸 ? 주인공은 바로 너 ! 바로 너 ! Bring the boys out → The boys 는 혼란에 빠진 세상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특별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 소녀시대 자신들이 그 the boys 의 출현을 도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 내가 이끌어 줄게 come out. 세상 남자들이여 난 , No.1 지혜를 주는 Athena. Check this out! →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는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대표적인 여신이자 , 숭배의 대상이다 . 소녀시대는 자신들을 바로 그 아테나에 비유하고 있다 . 결국 , The B oys 는 소녀시대 와 the boys 들이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갈 것이라는 메시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 소녀시대 『 The Boys 』 가사 분석The End{nameOfApplication=Show}
7 조 이보한 , 이성희 , 임경미 , 전성원 , 조주헌 과 , 그리고 이병철과 유일한2012 년 2 월 초 , 한국능률협회컨설팅 (KMAC) 이 ‘2012 년 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 ’ 선정 리더 선정을 위한 Step 순위 기업명 1 삼성전자 2 포스코 3 유한킴벌리 4 현대차 5 유한양행 WHY?목차 1. 이병철 , 유일한의 간단한 소개 2. 삼성과 유한양행의 설립 4. 경영철학에 따른 두 회사의 발전양상 3. 이병철과 유일한의 경영철학 5. Discussion이병철 . 유일한 . 그들은 누구인가 ? - 1930 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학과 입학 - 1938 년 대구에서 자본금 3 만원으로 삼성상회 설립 - 1948 년 상경 후 삼성물산공사 설립하여 무역업에 착수 - 1951 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 설립 , 운영 - 1953 년 제조업에 투자함으로써 산업자본화 , 제일제당 설립 - 1961 년 한국경제인협회 창설하여 초대회장 역임 - 1969 년 삼성전자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 만듦 그 뒤에 신세계백화점 등 인수 , 삼 성 중공업 , 동양방송 , 중앙일보사 등 창설 , 운영 사업 다각화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 호암 이병철 (1910-1987) ‘ 삼성 ’ 이라는 이름 하에 재벌기업 형성 유일한 (1895-1971) - 1904 년 9 세 때 ,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감 - 미시간대학교에서 학사 ,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석사 , 스탠포드대학원에서 법학 전공 - 1922 년 숙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식품주식회사 설립 - 1926 년 12 월 , 유한양행 설립 - 1934 년 프론토실을 동양 최초로 도입 - 1939 년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 실시 - 1969 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의 길을 여는 데 선구자적인 역할 기업의 ‘ 사회적 공헌 ’ 개념의 선구자목차 1. 이병철 , 유일한의 간단한 소개 2. 삼성과 유한양행의 설립 4. 경영철학에 따른 두 회사의 발전양상 3. 이병철과 유일한의 경영철학 5. Discussion1938 년 삼성상회 설립 주력 제품은 국수 ‘ 삼성 ’ 과 ‘ 유한양행 ’ 의 설립 19 26 년 12월 서울 종로2가에 유한양행 설립 주요 사업은 의약품 수출입 및 판매업 1목차 1. 이병철 , 유일한의 간단한 소개 2. 삼성과 유한양행의 설립 4. 경영철학에 따른 두 회사의 발전양상 3. 이병철과 유일한의 경영철학 5. Discussion두 Leader 의 경영철학 Difference 총 ‘ 4 가지 ’ 차원에 걸쳐 이병철과 유일한을 비교설립 동기 두 Leader 의 경영철학 Difference 사업 보국 사회 책임 국민 국가 국 민 국 가경영방식 이병철의 기업관 유일한의 기업관 기술 혁신을 통한 수출 중심의 사업 국민 건강 및 소비자 효용을 생각하는 사업 두 Leader 의 경영철학 Difference 기업 목표 = 이윤창출 기업 목표 = 사회공헌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 차이 기업의 성장과 발전 사회적 책임 사회적 책임 국민 건강 증대 및 사회적 효용의 증가 간접적 직 접적 두 Leader 의 경영철학 Difference후계자 채택 방식 세습 전문 경영인 고 용 두 Leader 의 경영철학 Difference목차 1. 이병철 , 유일한의 간단한 소개 2. 삼성과 유한양행의 설립 4. 경영철학에 따른 두 회사의 발전양상 3. 이병철과 유일한의 경영철학 5. Discussion의 사업 전개 활발한 신 사업 진출 적극적인 M A 를 통한 기업 확장 1969 년 삼성전자공업 설립 1948 년 삼성물산 설립 1953 년 제일제당 , 제일모직공업 설립 1958 년 안국화재 인수 ( 現 삼성화재 ) 1963 년 신세계 백화점 , 동방생명 인수 ( 現 삼성생명 )의 사업전 개 사회 환원에 중점 기업이윤을 회사에 재투자하기 보다는 사회 환원 1970 년 유한재단의 전신인 ‘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금 ’ 을 사재로 출연 동종 산업에서의 사업 확장 유한 킴벌리 등 관련 사업 다각화 전개 1978 년 유일한이 학교법인 유한학원 설립의 발전과 현재 긍정적인 면 지속적인 매출액 성장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삼성의 발전과 현재 부정적인 면 비자금 관련 이슈 직원들의 집단백혈병 발생 문제 범삼성家 상속 분쟁의 발전과 현재 긍정적인 면 0 1 1975 년 노조가 생긴 이래 , 발생한 노사분규 횟수 유한양행 직원들의 이직률 (%)의 발전과 현재 부정적인 면 사업 경쟁력 약화에 따른 주가 하락목차 1. 이병철 , 유일한의 간단한 소개 2. 삼성과 유한양행의 설립 4. 경영철학에 따른 두 회사의 발전양상 3. 이병철과 유일한의 경영철학 5. Discussion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토론주제 1. 여러분이 기업을 세운다면 , 어느 매니저의 경영철학에 따라 진행하시겠어요 ? 토론주제 2 . 경영자의 경영철학이 기업에 잘 녹아 든 사례를 말해보아요 ! (ex. 기업문화 , 경영전략 )감사합니다 ^-^{nameOfApplication=Show}
가든 오브 에덴 감상문소속 : 생활과학대학 가족아동학과학번 : 2008-13096성명 : 이 성 희줄거리 요약 :영화 ‘가든 오브 에덴’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예수의 청년기를 그리고 있다. 어린 예수는 목수이자 지혜로운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한 여성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면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길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이들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못을 줍는 보아스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는 보아스가 로마인들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등 열심당원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끼며 다시 길을 떠난다. 다양한 곳을 떠돌며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예수는 인도에 이르러 불상 앞에 마주하기도 한다. 이후 그는 낙타 모는 일을 하며 신의 계시를 기다린다. 그러던 중 도적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한 아지스를 구해주나 아지스는 예수를 배신한다. 사막에서 쓰러진 예수는 에세네파에 의해 구조된다. 예수는 그곳에서 쿰란공동체의 친절함과 호의를 느끼기도 하나 규율과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바리사이들과 대립하며 논쟁을 벌인다. 때문에 예수는 40일 간 세탁을 하게 하는 벌을 받기도 한다. 결국 그들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쿰란을 떠나 사막으로 향해간다. 그곳에서 그는 사탄을 마주하고 이내 사탄을 포용하고 동시에 정복한다. 예수는 이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신자들을 거느린 채 그는 길을 떠난다.감상 :낸시 피어시의 저서 ‘완전한 진리’에서는 성경이 종교를 비롯하여 우리의 삶과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완전하고도 진정한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성경에서 제시하는 완전한 진리를 수용하고 따르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 ‘가든 오브 에덴’은 완전한 진리와 가장 극단에 서 있으며, 진리에 대한 모독이자 예수의 이름에 기생하며 거짓과 악을 논하는 사탄과 다름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신론의 내 종교관은 차치하고서라도 유일, 완전한 것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반감 때문이다. 크로체나 콜링우드와 같은 역사가가 말했듯이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이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눈을 통해 보는 현상, 그러니까 개인이 그 현상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진리도 역사도 완전할 수 없으며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 현상을 스스로 느끼고 체험하며 스스로의 기준에 맞춰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영화 ‘가든 오브 에덴’의 시각은 매우 신선하고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예수의 청년기에 대해 자유롭게 그려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주입되어 온 딱딱하고도 성스러운 예수의 이미지에 벗어나서 보다 인간적인 예수를 접할 수 있었다. 영화 속의 예수는 한 여자의 남편임과 동시에 한 명의 아들의 역할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또한 그가 불상과 마주하는 모습에서는 예수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배신당하여 사막에서 버림당하는 모습이나 벌로 40일 간 의복을 빨게 되는 모습을 통해 기존의 성스러운 신적인 예수의 이미지 대신 고뇌하고 갈등하는 한 명의 인간인 예수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이야 말로 현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과 마음을 길러줌으로써 완전한 진리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한다.
영화 을 통해서 본 새로운 가족의 탄생소속 : 생활과학대학 가족아동학과학번 : 2008-13096성명 : 이성희21세기에 가족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경제 발전시대였던 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이 셋은 기본으로 생산해 놓아야 정상가족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들어서 아이를 낳는 부모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는 가족은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가족을 이룬다는 정상가족의 모델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저출산·이혼율·단독가구 등의 증가로 정상가족모델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가족의 형태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소비의 단위가 가족이 아닌 개인으로 점차 개편되면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믿는다고 행복해지지 않는 허구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의 붕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갑지만은 않다. 혈연에 기반한 가족은 여전히 필수구성성분으로 받아들여진다.가령, 우리가 엄마를 잊음으로써 엄마를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신경숙의 외침이나 가족의 이해와 사랑으로 ‘즐거운 나의 집’을 가질 수 있다는 노래하는 공지영의 소설이나 혹은 끈끈한 가족애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따뜻한 가족풍경을 그린 주말 드라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서 가족은 절대적 사랑과 믿음을 토대로 행복과 평화를 약속하는 하나의 판타지가 되고 우리는 환상 속에서 위로받고 삶의 신산함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이 이해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어갈 때 고찰과 성찰의 대상이 아닌 절대적인 가치로 부각될 때 무너트리기 어려운 거대담론이 된다. 가족이란 이름 하에 모든 것이 용인되고 배타적인 이해 대상이 될 때 표면적 담론 속에서 정말로 바라보아야 할 것들을 잊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가장 멀리 있는 것 마냥 서로의 생각과 감정 따위에 무심한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가 핏줄이라는 허울로 덮고 있는 가족보다 실제로 서로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일러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에게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나의 가족이라서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현재 고착되어 있는 주류문화가 내뱉는 가족붕괴의 탄식에는 이것이 빠져있다. 전통적인 가족과 가부장의 존재여부가 사랑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복원해야하고 복원되어야 할 것은 가족구성원의 사랑과 배려이지 그 형식상의 껍데기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그러한 점에서 영화 은 전통적인 혈연관계의 가족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의 탄생에 대해 말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족의 탄생스토리를 기막히게 보여준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영화 속 ‘채현’은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두 명의 여인을 ‘엄마들’이라고 부른다. 영어의 'uncle'도 아니고 작은아버지, 큰아버지로 구분지어 부르는 우리의 가족호칭에서 비추어 볼 때 ‘채현’의 호명 방식은 놀랍다 못해 혁명적이다. 이렇듯 영화 에서 표현하는 가족의 구조는 ‘남자=아버지, 여자=어머니’라는 생물학적 구성이 아닌 부성과 모성의 감정적이고 본질적인 기능에 기반한다. 권위로 억누르는 아버지, 애정과 집착 사이를 혼동하며 가로지르는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보호하고 배려하는 부성과 모성의 가족, 그것이 영화 속 ‘채현’의 가족인 것이다.또 다른 장면, 남동생과 그의 나이 많은 연인과 누나가 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 장면은 특히나 인상깊다. 처음 원수에 가까운 남동생과 그의 나이 든 연인과 미라가 함께 나누는 밥상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공기가 흐른다.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긴밀함에 끼어든 타인과의 밥상. 게다가 뻔뻔한 남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표정은 가히 예술이다. 잠시 나갔다 온다던 남동생은 나가서 소식이 없고 문소리와 고두심은 마주 앉아서 계속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동안 바깥풍경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 준다. 아침, 점심, 저녁을 먹으며 한 끼, 두 끼 쌓여가는 동안 고작 1m도 되지 않는 반경 속에서 타인과의 식사는 계속된다. 그 반복된 행위를 통해 상대방이 피가 섞여 있든 말든 타인을 점점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족애란 아버지가 떳떳한 회사를 다니고 다정한 어머니가 있고 토끼같이 귀여운 자식들이 이루는 앙상블이 아니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묵묵히 밥을 나누며 서로의 친밀감을 쌓아가는 행위에 있는 것이다. 혈연 중심의 정상적인 가족이 뿜어내는 위선보다 친밀성으로 똘똘 뭉친 새로운 가족의 탄생에 눈길이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러한 시점에서 앤소니 기든스라는 학자에 대해 주목해볼만 하다. 결혼과 가족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새로운 관습적 사고를 구성하는 핵심은 단연 친밀성 혹은 친밀관계로서 이런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변화의 경향을 가장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은 친밀성의 변동이란 측면에서 바라보는 앤소니 기든스의 주장일 것이다. 그는 현대성이란 “자연세계의 사회화, 곧 인간 행동의 범위를 벗어나는 구조와 사건들이 사회적으로 조직된 과정으로 점진적으로 대체되는 것을 동반한다. 사회생활자체 뿐만 아니라 ‘자연’이었던 것도 이제 사회적으로 조직된 체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섹슈얼리티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적인 반성의 대상이 미치지 않는, 그가 널리 유행시킨 개념을 빌자면 성찰성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섹슈얼리티라는 영역, 특히 무엇보다 사랑으로 대표되는 친밀관계가 이제는 적극적인 해석의 대상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는 낭만적 사랑이 가진 잠재성은 이제 적극적인 반성과 기획을 통해 “합류적 사랑”) 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변용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주장은, 유사한 관점에서 현대 가족의 풍경을 조망하는 엘리자베스 벡-게른스하임의 저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저서에 벡-게른스하임은 개인화라는 원동력, 즉 성찰적 근대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선용하는 그리고 그녀 역시 참조하는 개념처럼 ‘계획 수립 프로젝트로서의 삶’이라는 경향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족과 결혼, 부모신분이란 영역 속으로 침투하고, 이를 재구조화하고 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이로부터 그녀는 과거에 우리가 품어왔던 이상적인 가족의 견고한 이미지가 허물어져 가고 가족은 무엇이라는 어떤 일의적인 정의가 불가능하게끔 하는 가족형태의 영속적인 변화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벡-게른스하임의 표현을 빌자면, ‘허약성의 정상화’가 다름 아닌 미래 가족의 경향일 것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점에서 가족이 현대사회의 대다수사람들에게 정서적 만족을 주는 필수적인 원천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가족이 정서적 만족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독립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가정은 정서적 만족은커녕 새로운 억압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전통적 가족의 다름 아닌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가부장을 제외한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억압과 구속으로 나타났듯이 사회적 환경이 바뀌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면 신뢰감과 만족감을 갖는 가족의 형태도 변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고 할지라도 사회구성의 기본구조로서 가족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달라진 삶의 표정만큼 가족의 정상성이나 의미, 구성이 달라질 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가족은 당대사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반영상임에 틀림 없다.
성찰적 소서사 - 엄마와 고래소속 :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학번 : 2008-13096성명 : 이 성 희나는 누구인가? 쉬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이 물음 앞에 서면 ‘신은 누구인가?’라는 거창한 질문보다 되려 더 어렵다고 느껴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내일의 나는 또 달라질텐데 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 될 테고 더군다나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늘 생각해오던 것이지만 언어라는 것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표현하기에 너무나도 부족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과 느낌을 단어 속에 가둬놓고 한정시킨다는 것은 때론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하나의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 커지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를 왜곡시키지 않고 보다 잘 대답하기 위해서 나를 설명하고 정의하기보다는 그저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어쩌면 내 스스로나 타인의 시각에서나 보다 정확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나를 비춰보려고 한다.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차가운 파도가 휘감았다. 그녀는 파랗게 빛나는 고래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고래는 거대한 유선형의 몸체를 우아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꼬리를 철썩거리다 이따금씩 힘찬 분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헤엄을 쳐도 고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매끄러운 거죽이 손에 잡힐 듯 코앞에서 번들거렸지만 고래는 늘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래는 다시 한번 크게 물을 뿜어낸 후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깊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허탈해진 그녀는 지칠 때까지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다시 고래가 솟아오르길 기다렸지만 끝내 그녀는 고래의 눈은 감겨있어서 소녀를 볼 수도, 움직일 수 없다. 소녀 또한 고래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울산이라는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대개 사회시간에 배우듯이 산업화 시대의 대표적인 도시라는 것과,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인 김태희가 태어난 도시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어서 내 고향이 울산이라고 밝힐 때마다 사람들은 공장과 크레인, 김태희에 대해서만 궁금해 했었다. 하지만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이 울산의 일산 앞바다에 현대중공업의 터를 잡기 전, 더군다나 김태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울산은 고래로 유명했던 작은 어촌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포경이 법적으로 금지돼 고래와 관련한 사업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잡이의 중심이었던 울산의 장생포에는 고래 박물관을 세우고 지난 세월을 그리고 있다.우연찮게 그 곳에서 나는 위의 사진을 발견했던 것이다. ‘고래와 소녀’라고 이름 붙여진 그 사진을 말이다. 그 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친숙함, 아련함. 그 사진 속의 소녀는 다름 아닌 나의 엄마였고, 그 고래는 외할아버지가 잡은 밍크고래였다. 가장 거대한 포유류와의 치열한 사투 끝에 얻은 포획물. 배를 타는 남자들의 피와 땀과 열정이 녹아있는 고래라는 산물 앞에서 소녀는, 그러니까 엄마는 행복감보다도 애처로움을 느꼈던 듯하다. 사진 속 소녀의 눈빛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에게 고래는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도 같았으며, 그 바람은 끝내 채워질 수 없는 허기와도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갑게 굳어버린 고래를 보았을 때 그것은 그녀를 평생 따라다닐 아득한 그리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울산이라는 도시는 산업화와 동시에 근대화라는 흐름이 가장 크게 휩쓸고 간 자리일지도 모른다. 소녀가 숙녀로 변해가는 사이, 세상은 바뀌었고 고래잡이는 사라졌다. 장생포와 마주하는 건너의 바다에는 커다란 크레인이 세워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왔다. 아빠는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빠를 만나 결혼했다. 돌이켜 바라보면 엄마와 아빠, 향토민과 이방인의 만남, 전근대화와 근대화의 만남. 한켠으로 아이러니컬한 모습이다.아무튼, 그 사이에서 나는 태어났다. 나의 몸속엔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가 남아 흐른다. 세계가 새로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도, 생명은 결국 그렇게 이어지는 법이다. 나의 육체 안엔 지난 세월들을 관통해 온 그들이 남아 있다. 이야기 또한 그렇게 시간을 가로지르며 생명을 연장해간다.사진2.사진첩을 연다. 사진을 본다. 두 여자가 서 있다. 젊은 여자는 꽃다발을 안은 채 웃고 있고, 나이 든 여자도 젊은 여자를 축하해주고 있다. 젊은 여자의 얼굴은 세숫비누 같다면 나이 든 여자의 얼굴은 빨래비누 같다. 하지만 그 두 여자 모두 사진 너머까지 전해지는 은은한 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 작은 남자아이는 멀뚱히 서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서 이걸 어디에 써야하는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 후 몇 번의 가을이 오고 갔고, 그 시간의 자국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남았다. 노랗게 그러다가 갈색빛으로 물들어 간 그 사진을 본다.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진은 갈색빛을 지나쳐 회색, 검은색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조각나고 흐려지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조각난 것들을 기억하는 것, 흐려진 것들을 바라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한 사람이 성장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때문에 그 사진을 나는 잊지 못한다.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항상 글을 썼다. 빨갛고 네모낳게 각진 원고지에 몇 백장씩 빼곡하게 글자를 쓸 때도 있었고, 새하얀 종이 위에 몇 줄 남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조심했어야 했는데, 글을 쓰는 동안에 엄마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정신은 예민했다. 율무차를 끓여달라는 동생의 투정에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려놓고도 그 사실을 잊을 정도로 몰두했다. 주전자가 타고 연기가 집을 뒤덮었을 때도 엄마는 곧장 종이 앞에 돌아와 앉았다. 그렇다고 나와 내 동생이 엄마느꼈다. 하지만 아빠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조금 더 가족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이길 원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우리 집의 모든 가전제품은 박살이 났다. 깨진 TV의 액정유리를 밟은 나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애써 삼켰다. 혹, 울음을 터뜨렸다 해도 누구도 듣지 못했을 테지만. 그 날, 아빠는 직접 차를 태워 학교에 나를 데려다줬다. 끝끝내 나는 눈물을 눌러담았지만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굵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빠의 눈물을 그날 처음 보았다. 그날 이후로 달라진 게 있다면 엄마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과 집안의 모든 물건이 새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커다란 평면 TV가 자리잡은 순간, 그 때부터 나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영화를 보게 된 다른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엄마가 글에 몰두하듯이 아빠가 회사 일에 집중하듯이 내가 잘 빠져들 수 있는 것이 영화였고, 더군다나 새로 산 커다란 평면 TV를 썩혀둘 수는 없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B급 영화도 괜찮았고 미셸 공드리의 판타지즘도 좋았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옛날 영화도 즐겨보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감각적인 영화들도 괜찮았다. 사실, 그 어떤 영화라도 괜찮았다. 그 당시엔 그 속에 담겨진 의미와 상징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내면화시키는 것보다는 화면 속에 맺힌 세상을 통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영화 속의 장면들은 마치 푸르게 반짝이는 고래처럼 반짝이는 신기루 같이 아득했지만 매력적이었다.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대학을 가야 할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수업보다는 영화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홀로 글을 써보기도 하고 밤새 영화를 보기도 했다. 물론, 그 때문에 학교에서는 주로 잠을 잤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SKY의 입시원서를 준비하고 계시던 선생님은 당황하다 방임에 가까울 정도의 믿음을 부모님은 주셨고, 적어도 엄마와 아빠 중에 엄마만은 나의 선택을 응원해 줄 것이라 믿었다. 달아오른 뺨이 밤바람에 차차 식어갈 즈음 집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엄마는 내 선택을 반대하셨다. 아들이 힘든 길을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나의 뒤를 지켜봐주고 믿어 준 엄마가 해준 엄마의 조언이자, 안내였다. 결국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안에 숨겨둔 채 ‘샤’의 문턱을 넘었고 지금에 이르렀다.누군가는 그랬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좋아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보다는 조금 떨어뜨려두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항상 몰두해 있을 때보다도 잠시 떨어져서 멀찍이 머물러 바라본 그것을 또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편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또 글을 쓸 수 있었다. 대학교 신입생 때 그러했었고, 특히 군대에 있으면서 그 말이 더 깊게 와 닿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욕심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도 없다. 운좋게 피해갈수 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시간이 흘러 두 여인과 꼬마아이의 사진을 보았을 때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꽃다발을 안고서 수줍은 미소를 짓는 엄마의 옆에 서있던 여자는 놀랍게도 박완서였다. 엄마는 해냈던 것이었다. 눈 앞에서 사라진 고래는 비록 차가운 시체로 엄마와 마주했지만 엄마는 고래를 위해서, 신기루를 향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아빠 몰래 나의 손을 이끌고 갔던 어느 호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