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
검색어 입력폼
  • 함석헌의 국가주의 극복
    함석헌: 국가주의를 극복 방안박노자 (Vladimir Tikhonov), 오슬로대 (University of Oslo), 노르웨이1. 한국적 근대의 최대의 미(未)해결 과제라면 아마도 주체적이면서도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의 만들기이다. 1920년대초반부터 “개인”이나 “인격”은 빈번히 쓰이는 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인은 “민족”/”국가”라는 틀 안에서 갇히기도 하고 “여성”으로 성별화되어 “가족”이라는 이름의 전체에 복속되기도 하고, “아동”으로 분류돼 훈육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특정 종교의 “신자”로서 종교 집단의 테두리에 갇히기도 했다. 물론 “민족”을 명분으로 삼은 국가가 자본가 계급을 창출시키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병영화 (兵營化)를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개발주의라는 역사적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는 민족/국가라는 전체성이 개인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지배하게 됐다. 오늘까지 와서도 권위주의적 중심주의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가 “가장 인기가 높은 전직 대통령”으로 여러 여론조사에서 등장되어 보통 60-70% 안팎의 응답자로부터 조건부긴 해도 전반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지난 시대의 내면적 주체성의 미(未)확립이 어떤 장기적 결과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던 예수를 신앙한다 하면서도 “군대는 우리 울타리””라고 늘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의 수가 약 60만 명이나 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과연 이 60만 명 중에서 조 목사 설교문과 예수 가르침의 일치 여부에 대해 독립적 개인 판단을 시도해본 이들이 몇 명이 될까? 몰개성적인 “일체단결”은 일부 종교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전체의 하나의 “아비투스” (habitus: 관습)를 이룬다. 독도 관련의 일본과의 분쟁이든 월드컵이든 “국가”/”민족”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유도하는 “이벤트”들이 잘 보여주듯이,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의 주술에 대식민지 피지배자로서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은, 함석헌의 개인적 생각이라기보다는 그 당시로서 일부 공산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를 제외한 다수의 조선 지성인들의 지적인 공동 분모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무사 정신의 쇠퇴”, “모화 (慕華) 사상”, “조선인의 이기주의” 등에 비판의 중점을 맞춘 “패인 찾기”는, 그 원형에 있어서는 근대 계몽기의 계몽주의자들이 내면화한 서양/일본의 유교/중국 비하 인식 등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계승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피식민자 (被植民者 – the colonized)로서의 “패인이 된 전통의 탓하기”와 식민자 (植民者) 오리엔탈리즘의 일정한 내면화라는 부분을 떠나서라도, “전근대”에 대한 배제가 근대적 앎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세계 사상사의 보편이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함석헌이 일명의 근대적 지식인으로 그 지적 여정을 출발한 것이다.그런데 애당초부터 그의 민족주의는 그 당시를 풍미했던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와는 그 본질을 달리했다.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는 “彼와 我의 투쟁” 중심의 약육강식이라는 과정을 통한 “민족사”의 전개를 설정했다면, 함석헌의 종교적 민족주의는 “민족사”의 과정을 “신의 아가페에 도달하는 여정, 종교적, 도덕적 “민족적 자아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했다. 함석헌의 “민족”은, 민족주의자들이 흔히 상상하곤 하는 “통일된 인격체”이긴 했지만, 이 인격체는 통상적인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의 “전사상” (戰士像)과 다른 “종교인상” (宗敎人像)이었다:“민족의 성쇠도 국가의 흥망도 모든 문화도 다 이 하나님을 탐색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이미 를 저술했던 당시인 1930년대 중반에 함석헌은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민족”의 발달 과정을 개인에 빗대어 “발생기” (원시시대), “성장기” (고대 및 중세), “단련기” (중세 이래 지금까지), “완성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나누어보고, “민족 분화”, “각 민족의 문화 완성”의 시기로 “성장기”를 주목했다. 그 뒤에, 1960년대 초에 의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 주로 야만시(野蠻視)됐다:“저들 [아프리카인]에게 있어서 주되는 것은 정신도 아니요 인간도 아니요, 그저 자연뿐이다. 그 문화에서 종교의 볼 만한 것도 없고, 과학도 없고 그저 원시적이다. 본능적이다. 거기 있어서 사람은 자연의 위대에 압박되어 있다. 자연만으로는 어떻게 무력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프리카다”.“무의미한 원시적 아프리카”를 제외하면, “유의미한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천적” (天的) 아시아와 “인적” (人的) 유럽만이 남는다. 이 둘 사이의 가치 평가를 함석헌이 어떻게 했는가? 함석헌이 세계사를 각종의 민족들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역할을 맡으면서 고유의 특질이 허용하는 대로 인류 전체를 “신”이라는 궁극의 지점으로 이끌고 가는 우주적 과정으로 파악했다. 신의 섭리에 따르는 역할이 원칙상 모든 민족들에게 주어지기에, 원리원칙으로 본다면 함석헌의 종교적 세계사 시각은 배타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영 (靈), 정신의 고장” 아시아는 “인류의 발원지”, “문명의 요람”임에도 본래부터 “보수성이 강한 인종” 이기 때문에 “역사가 만일 아시아인의 손에만 맡겨졌다면 보수 (保守), 고루 (固陋)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에 유럽은 “인간 중심”적이며 “현실적”이며 “진취적”이다. 함석헌이 늘 존경하여 1962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 미국의 종교 철학자 호킹 (William Hocking, 1873-1966)도, 인도와 같은 “동양” 문화의 “영적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일부 힌두교 철학의 “현실 실제성의 지나친 부정, 과도한 유식론 (唯識論)”이 “유럽과 같은 진취적인 자연의 탐험, 과학적 문명의 창조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인도 문명의 소극성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보지 않았던가? 즉, 많은 서구,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들처럼 함석헌이 현실적 의미의 인류 “진보”의 공로의 대부분을 유럽/기독교에 돌리는 것이다.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가 유럽의 “자원 공급지 역을까? 지금까지도 양심적 병역 거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 (安息敎)에 속하지 않는 기독교 사상가로서 선구적으로 –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유일하게 - 병역거부를 주장하여 1957년3월에 병역을 거부하여 1년4개월 감옥에서 복역하게 된 제자 홍명순 (洪命淳)을 키울 수 있는 힘, 군인을 “나쁜 직업”이라고 이야기하고 군대의 “궁극적 폐지”를 바랄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었던가?일차적으로는, 스승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1930)처럼 “무교회주의자” 함석헌도 “protestantism”을 원시 교회의 “진실된 정신의 회복”으로 보면서 근본적으로 “개인 자유의 존중”으로 간주했다. 외부적 자유라고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일제시기의 한참인 1930년에, 젊은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은 자신이 믿는 “종교” 내지 “신앙”을 다음과 같이 “내부적 자유의 공간”으로 그렸다:“신앙에 들어가는 지도를 하는 것은 옳으나, 신앙은 이러할 것이라고 외적으로 규정하고 간섭하는 것은 근본에서부터 잘못된 일이다. 신앙이란 나라는 사람 – 나, 온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나, 하나님이 다른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찾아다니는 나, 독특한 개성과 가치를 가지는 나 라는 사람, 그 나와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는 개인적인 종교다. (…) 신교는 교권을 부정하고, 교회의 조직에서 개인을 해방시켜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물론 위에서 고백된 젊은 날의 함석헌의 개인주의는 엄정하게 이야기하면 “종교적 인격주의 (personalism)”이지 세속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와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함석헌 자신은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소위 개인주의”/“이기심이나 [개인] 독립”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구원이 궁극적으로 전체적이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하고, “성서 중심주의”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독교적 인격주의자이었던 그에게는 북유럽 여러 국가에서의 신교의 국교화는 진정한 의미의 개성적 종교의 배신이에서 결국 “민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해동포적인 기독교’가 탄생됐듯이, “민족”이 “세계’를 준비한다는 것은 함석헌의 논리이었으며, “민족의 역사란 신이 우리에게 지우는 짐”이라는 것은 그의 결론이었다. 그는 “민족” 내지 “인종”을 중심으로 한 패러다임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원칙에 충실한 종교인으로서 이를 어느 정도 “하위 배치”시키는 데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4. 함석헌에게는 “하나님을 향해 전개되어가는” 세계사는 민족들의 역사, 즉 국가들의 역사이었지만, 특히 1950년대 후반 이후의 그에게는 “국가”란 모순, 갈등으로 이해됐다. “비주류 종교인”으로서의 함석헌은, 민초들을 오로지 통제와 순치의 대상으로만 다루고 관제 (官制) 국가주의를 하달시켜도 민의를 수렴할 줄 모르는 외삽적 (外揷的) 성격의 독재 국가, 그리고 이 국가를 “반공의 기지”로 삼아 유착 관계에 들어갔던 “주류” 기독교계와는 늘 길항적인 관계에 있어왔다. 그가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명문 (名文)에서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서는 혁명 아니다. (…)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해도 참이 아니다”라는 명구 (名句)를 남겨 박정희의 정변에 대해서 거의 즉각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린 유일하다 싶은 국내 지성인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부국강병”에 대한 집착을 근·현대 1세기 동안 거의 끝내 버리지 못해온 후발주자 한국에서, 그것도 부국강병에의 열망이 국시 (國是)이자 거의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내면화한 이데올로기가 된 시점에서, 함석헌이 국가주의를 “평화의 정말 방해자”라고 규정하고, “국가 지상주의”, “정부지상주의”, “국가주의라는 큰 우상”을 “깨뜨려야 하는” 대상으로 설정했다. 정부가 “계몽”과 “근대화”를 이끄는 “절대선” (絶對善)으로 인식돼온 토양에서는, 함석헌처럼 정부를 “필요악
    사회과학| 2010.09.27| 13페이지| 1,000원| 조회(107)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4일 일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33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