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시험대비=서구적 사고동일성이란는 것이 가장 기본 베이스에 깔린 생각/ 추상화하는 능력인 이성과 구체적인 것을 인식하는 경험 중 이성을 더 우위의 것으로 여김 이유는 서구가 중요시 여기는 동일성, 동일률은 이성이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구체적인 것이므로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통일성도 중요시 여김-무질서해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통일성을 찾으려고 노력함1. 파르메니데스불변하는 것이 진리이고 변화하는 것은 억격(독사)이다. /홀리는 눈과 속이는 귀(어쩌면 얘네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할 때 유일한 증인일 수도 있다.)/파르메니데스는 감각은 항상 오류에 빠진다고 생각하며 다른 인식기관을 설정했다. 그것이 이성이다./쓰기도하다가 안쓰기도한 맛,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상대적으로 내가 가까이선 크고 멀리선 작다. 그럼 나는 작은가 큰가?)이런것이 그가보기엔 모두 억견에 불과하는 것이었다./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변화하는 것을 믿도록 만들지만 진리는 불변한다./억견이 제시하는 변화 네가지 1. 장소이동 2.양적변화(성장) 3.질적변화(성격의 변화) 4.생성소멸-그는 이 모든 것들이 a였다가 non a가 되는 것 즉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변했다. 이말은 그전의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그래서 그에 따르면 생성과 소멸은 없다. (그는 모든 변화를 생성과 소멸로 환원시킴)그러나 그에게 있어 불변은 시간적 의미의 영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적 연속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것이다. 이는 영원과는 의미가 다르다.파르의 존재 1. 나뉠수 없는 전체(하나)이다. 공처럼 생겼다고말함 중심에소 모두 같은 거리에 있는 완벽한 하나를 나타내는 심볼 2. 운동하지 않으며 끝도 없고 생성도 없다. 이 두 가지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생성하지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니 운동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성되지 않으니 하나여야함은 자명하다. 완벽한 동일자적 존재를 그는 말하고 있는 것/ 그에게 있언제 있었던 것도 아니요, 있게 될 것도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있기 때문이다."6.존재는 공처럼 생겼고, 전체이고 단일한 종이며 움직이지 않으며 시간적으로 끝이 없고생성.소멸되지 않으며 불변하다.7.변화(kinesis): 장소이동, 양적, 질적 변화, 생성과 소멸8.진리의 길과 억견의 길9.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이 생각하기에 이러한 논의들은 지나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본 게시판의 17, 18번을 참조).?그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변의, 공같이 생긴, 하나 뿐인, 존재로 충만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 플라톤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존재와 매우 유사한 이데아 개념을 도입/차이점은 파르메니데스는 다양성을 모두 추상화한(양, 크기 따위를 모두 추상화했기때문) 반면 플라톤은 현실의 다양성을 반영해 무수히 많은 이데아가 있음을 말함플라톤은 일자들을 무수히 구현해냄/ 원형을 부여하기위해 ‘이데아’를 도입 두세계가 있고 우리는 현실에서 이데아를 모방하며 살고있음/ 초월적인 이데아계는 현실을 설명하는 역할을 함 예) 붉은 머리 붉음의 이데아가 깃들었다. / 현실은 질료와 같은데 이데아라는 형상이 들어왔다. / 그리고 파르와 다른 점은 본질과 우연성들이 합쳐 존재가 되고 이 본질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우연성들은 다양하며 가변적이라고 설명하여 파르가 현실 설명에 취약했던 것을 보완함/ 본질-그것이 그것이게끔 만들어주는 것/우연성-이것이 사라지거나 달라져도 그것이 없어지거나 달라지지 않음/ 예)나의 키는 나에게 있어 우연성에 속함 내 키가 커져도 혹은 등이 굽어 작아져도 나라는 사람은 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음 나의 본질은 나의 키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플라톤이 살던 당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풍습과 행태등이 많이 망가짐. 그때 생겨난 의문 지혜와 영리 이기를 나누는 기준점이 무엇일까? 사랑처럼 보이는 것 말고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좋아보이는 것 말고 진짜 선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이 떠오름 그래서 도입한 준으로 해서 범주를 따진다. 실체=질료+형상 의 구체적인 것이다.그가 말하는 10범주=실체+9범주/ 실체는 본질(구체적인 사물의 독특한 구조, 구체적인 사물) 예-아기 혜영, 어른 혜영-구체적인 사물의 독특한 구조-불변하는 것은 그대로고 양이라는 범주만 변화하였다./ 본질적인 것은 남아있고 우연적인 속성(9범주들의 변화)들이 사라졌다. 실체=형상+질료/형상은 본질이다.-형상이 다르면 질료가 같아도 다른 속성을 지닌 다른 것이 된다. 예-야들야들 맛있는 만두피/꾸덕꾸덕 텁텁한 만두피 같은 질료로 만들어졌으나 다른 형상을 지니자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림가능태를 계발해 현실태가 되고 이를 어떤 장을 통해 활동하는 것-인간의 몫신론/특수형이상학하나의 특수한 존재자를 밝힘으로서 모든 존재자들을 밝혀낼 수 있는 학문, 모든 존재자들의 완성-모든 존재자들은 신을 자기의 가능성의 한도내에서 최대한 닮는다, 신은 가능성도 아니고 현실태도 아닌 활동태이다, 뭇존재자들 중에서 예외적인 존재자,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 그러나 신은 오직 형상만 그것도 활동태로서 불변한다.부동의 원동자/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을 규정하는 말아리의 특수형이상학의 질문-세상은 변화다, 그렇다면 왜 변화가 있을까? 총체적 해명이 가능하려면 어떤 특수한 존재자가 있어야할까?1. 변화엔 원인이 있다 2. 원인이 되는 것도 변화이다 3. 그렇다면 원인도 원인이 있어야한다. 4. 이 원인에 대한 두가지 답이 있다 첫째는 원인의 무한소급, 둘째는 궁극적인 원인의 존재/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할 때 이 원인이 무한소급된다면 세계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의 의미가 격하된다 생각했다. 의미를 규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원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부동의 원동자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그 속에 원인을 지니지 않고, 그렇기에 변화가 없어야한다. 그렇지만 모든 만물의 운동의 원인이 된다.cf. 플라톤의 일자는 이데아, 그러나 이는 무수히 많음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있는지도 모름/념이라고 보았다.오성, 판단, 개념은 모두 질료+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들어 발로 책상을 차서 넘어트렸다고 했을 때 발로찬 것 넘어진 것은 감각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차서 넘어졌다고하는 것은 오성의 형식 중 하나인 인과율을 적용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과율이라는 것은 인간이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경험이 없었다면 발휘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흄은 회의적인 관점으로 이성이 아닌 관습으로 인과를 아는 것 뿐이며 이것이 진짜 인과관계가 있는지 오비이락인지 우리는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칸트는 실체나 인과같은 순수 개념이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이는 경험으로부터 오지는 않았지만 경험과 함께 온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다시하자면 순수 개념은 질료로부터 오지는 않았지만 질료가 없으면 순수개념도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인식과 인식이 아닌 것흄은 당시 자연과학을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고 믿음일뿐이라며 평가절하하였다. 하지만 칸트는 자연과학의 대상이 전부 질료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만 이성의 작용으로서 인식의 가치가 있다거 평가 하였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에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누구나 같은 대상은 같은 식으로 파악한다고 보았다.(선험적 형식에 의하여) 과학은 대상 그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식된 대상에서 온다는 것은 흄과 칸트 모두 동일한 생각이나 칸트는 인간에게 이성이 있어 달리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순수이성ㅂㅣ판인식의 한계를 확정, 인식의 독단성 비판1. 인간은 사물 그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즉 물자체를 인식 할 수없다. 단지 현상을 인식할 뿐, 2.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질료가 있어야한다. 3. 범주를 경험을 원칙적으로 넘어서는 대상에 적용하면 형이상학에서 보이는 오류를 범하게된다. (이성의 이율배반) 4. 그러나 인간에게는 형이상학적 충동이 있음 5. 그래서 순수사변이성의 월권이 나옴. 신은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는 지식이다. 이는 인식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지식,경험적 근거를 넘어선 인식이다.순수 이성비판에서는 인서의 나는 확실히 다르다. 주체로서의 나에는 질료가 없다 하지만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내가 하는 행위들이 있으므로. 현상으로서의 나는 인과율에 종속된다. 이는 오성의 형식이 질료를 배열할 때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상으로서의 나는 자유가 없다. 그러나 나 자체 나라는 주체에게는 자유가 있다고 해도 논리적 모순이 없다.독일관념론: 나/주체 이는 무의식적이지만 나의 모든 것을 항상 따라다님/ 인간에게 실체란 자각될 수 없음 항상 인간은 변하고 있기에칸트의 형이상학적 대상은 나 혹은 영혼의 자유이다 기존엔 세계를 통째로 해명하려했으나 이는 독단처럼 느껴짐 그래서 특정한 실례에 닻을 내려 설명하려함 이게 자유이다.자유를 입증하는 방법1. 도덕현상잘못된 일을 한 사람은 마음속에 조금 켕기는게 있을것 이는 원천적이고 필연적인 가능성이다. 실제 현상을 말하는게 아님(현상의 진위를 묻는게 아님) 그 당시의 진위가 아님 원천적 필연적 가능성-과연 그 비순수한 동기가 전부일까? 아니다 다른 가능성이 있다 욕구에 의헤서 생겨난 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입증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면 어떠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면 나는 내 자유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나의 순수한 자유.2. 도덕 법칙성의 당위성이는 이데올로기적인가 아니면 내면의 동기인가 이데올로기라 보더라도 어떠한 내면의 동기 의무가 있을까? 현상의 도구(이기심,사심)과 전혀 다른 욕구(보편성의 원칙/ 내 딸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는 것 말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성적을 산출하는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전혀 다른 욕구라는 것은 어떠한 현상으로부터 오는게 아니고 순수실천이성으로부터 비롯됨현상의 나 순수한 나 둘 중에 누가 나인가? 순수한 내가 나이다. 물자체가 우위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준칙보다 순수한 준칙(법칙)이 당위이다. 왜냐하면 진짜 나의 요구를 중요시해야하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해 오염된 나 보다는 순수한 나의 요구가 더 맞다. 정당하다. 당위이다
문학과 영상예술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 감상문이 영화를 교수님이 보여주시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교수님은 ‘진짜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이 영화를 보고 느꼈다.’ 라고 하셨다. 교수님은 소년이 나이가 들어서도 여자를 위하여 책을 읽어주는 장면에서 그렇게 느꼈다고 하셨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보고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교수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소년이 전범 재판에서 여자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고 그 사실을 밝힌다면 재판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그 사실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문맹임을 밝히지 않는 것을 보고 진짜 사랑은 이런 것이 라고 느꼈다. 여기서 그녀가 재판에서 자신이 문맹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아마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는 여자가 ‘단지’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재판장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사실을 말하지 않고 무기 징역을 사는 것이 굉장히 미련한 행동으로 느껴졌었다. 그래서 소년이 여자가 문맹임을 밝히고 그녀의 형이 줄어들도록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소년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보다 더 넓은 생각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타인이 내가 될 수 없듯 내가 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그래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그 선택의 존중으로 인해 소년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는데도 말이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것은 진짜 사랑이란 소년처럼 내가 아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지난날의 나의 사랑을 반성했다. 나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나의 기대와 나의 생각에 끼워 맞추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지금껏 타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또 다른 나를 소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내가 했던 모든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지는 않지만 나에 대한 반성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준 영화를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상문화와 윤리쇼생크탈출을 보고(부제: 쇼생크탈출의 감상에 대한 다른 견해)우선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왜인지모를 불쾌함을 느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리고 이후 나는 그 불쾌감의 이유를 조별 과제를 할 때 알게 되었다. 조원들이 앤디의 치밀함과 끈기를 보고 희망의 존재를 느꼈다고 하거나 레드와 앤디의 우정이 감동적이었다거나 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나의 불쾌감의 원천을 찾게 되었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위해 관객들을 속였다. 이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앤디와 레드 레드의 친구들을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기 위해 죄수들을 미화해서 비추고 있다. 레드와 레드의 친구들 모두 범죄자이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죄수들의 죄목을 밝히지 않는다. 장난스럽게 “변호사가 변호를 제대로 못한 것이 내 죄다.” 라는 말만 할 뿐이다. 이렇게 죄수들의 죄목을 밝히지 않음으로서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죄수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만약 그 죄수들의 죄목이 성폭행범, 살인범 등 오랜 징역살이에 걸맞은 것들 이었다면 관객들이 그 죄수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을까? 그리고 나는 앤디의 무죄 또한 확실치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미의 기억이 확실한지 혹은 토미에게 자신이 골프강사를 죽였다고 말한 죄수가 제정신 이였는지 조차 불확실하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미 앤디와 레드 그리고 그 친구들에 대한 긍정적 인상을 가지고 있기에 앤디의 무죄가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하지만 이런 현상이 바른 것일까. 감옥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죄라는 것은 우리들이 사회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감옥이라는 곳에서 희망을 찾고 현실 속에서 보다 더 돈독한 의리를 다진다. 나아가 감옥이라는 곳에서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적인 면 보여주며 수동적인 관객들에게 감동이라는 거짓된 감정을 심어주고 나아가서는 영화에 심취한 관객들에게 감옥에 대한 환상을 갖게 만든다. 한동안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조폭영화가 흥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의 악인 조폭들을 마치 의리로 뭉친 진정한 남자들의 무리인 것 마냥 포장해서 멋모르는 어린 아이들이 조폭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나곤 했다. 이와 비슷하게 쇼생크탈출도 죄수들의 죄를 덮어놓고 관객들에게 일방적으로 감동을 주고 나아가 감옥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트루먼 쇼를 보고. (부제: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트루먼 쇼 속에서 트루먼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 같은 것은 없다. 그는 단지 전 세계 사람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트루먼이 살고있는 도시, 그의 직장, 그의 가족들 심지어 모든 것을 믿고 털어 놓는 친구 마저도 그를 속이기 위해 적절히 배치된 가짜이다. 트루먼을 속이기 위해 크리스토퍼는 트루먼이 살아가는 모든 주변 환경을 만들어 냈고 그의 행동양식 까지도 모두 지배했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는 트루먼이 물을 무서워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아버지를 그가 어린 시절에 그 때문에 물에 익사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자신의 삶에 안주하고 마을 밖을 나가지 않게 하기위해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트루먼에게 안정적인 삶의 가치를 주입시켰다.모든 것이 가짜이며 자신의 삶을 자신이 조금도 통제 할 수 없는 트루먼을 보며 나는 그를 불쌍하다 여겼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그를 불쌍하다고 여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불쌍하다 여기는 이유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주는 사람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그가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가짜라서 일까? 아니다. 내가 그를 가엽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이자 본질적인 이유는 그에게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트루먼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자기 주변의 일의 진실을 알지 못할 때도 많고 가짜를 진짜라고 믿고 살아 갈 때도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진실을 뒤덮고 있는 거짓들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진실을 추구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트루먼에게는 자유가 없다. 트루먼 하나를 통제하기위해 트루먼 하나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크리스토퍼는 마치 신처럼 모든 것을 조종한다. 그렇게 트루먼은 자유를 빼앗긴채 살아가지만 인간에게 아무리 트루먼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한들 인간의 가장 큰 존재목적인 자유를 앗아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트루먼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뒤로한채 자유를 찾으러 크리스토퍼가 제작한 인공 도시를 떠난다.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게 자유가 존재하는 지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인간은 자유를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으로 존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유란 인간에게 있어 다른 어떤 것보다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유가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한 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삶은 어쩌면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동물보다도 못한 삶일 지도 모른다.인간은 각자 나름의 자유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기준은 개개인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기준 하에서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즉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노예가 존재한다면 노예 또한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나는 법을 준수하고 보편적인 한국 사람들이 예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그러한 법과 예절이라는 개념에 억눌려서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나의 자유가 억압받았다고 누군가는 생각 할 수 있다. 어쩌면 진짜로 내 사고와 행동이 법과 예절이라는 것들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내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법과 예절이라는 개념 하에서 나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내가 순응하는 법과 예절이 나의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자유를 가지고서 그 것들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사고와 행동이 법과 예절 따위에 영향을 받더라도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그렇다면 나는 모든 이가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반대로 법과 예절이 자신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음에도 이를 준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반박을 누군가는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와 맞지 않은 법과 예절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사람 또한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그리고 그 자유로서 법과 예에 순응 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이 그러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무언가 (자신이 추구하는 또다른 가치)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