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을 싫어하는 남성들여성 혐오’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나라 사회는 뿌리 깊은 가부장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우리의 의식을 알게 모르게 지배해왔다.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를 철저히 남성 중심적 구조 속에서 돌아가게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여성들은 사회의 중심부에서 배제된 채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인으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우리나라의 남성과 여성은 각각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받았고, 이는 곧 일종의 암묵적 질서로 작용하며 우리를 조종했다. 하지만 최근 그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의 중심부에 진출하고, 심지어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는 분명 질서가 깨진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 바로 여성 혐오다. 다시 말해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하는 특별한 방식을 택함으로서 무의식적으로 기존의 남성 중심적 사회를 되찾으려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사회적 구조로서의 여성 혐오’는 한국의 잘못된 사회적 구조에서 여성 혐오의 원인을 찾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통적 특징이지만, 우리 사회는 특히 물신주의와 외모지상주의, 경쟁주의가 극단적으로 팽배해있다. 마치 이러한 특징들이 사회적 병폐가 아니라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정도로 말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늘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쉽게 자괴감을 느끼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나라 사회적 구조의 부정적 요소와 맞물려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연애, 결혼, 출산과 같은 많은 것을 포기하게 했고, 이 때문에 젊은 여성들은 결혼 상대 남성을 선택할 때 자연스럽게 남성의 경제적 여건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30대 이하의 젊은 남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남성이 특별한 원인으로 재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성교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우리나라의 사회적 구조는 결국 젊은 남성들을 견디기 힘든 열등감에 빠지게 했고,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혐오가 발생한다. 사회적 구조에 의해 열등감에 빠진 일부 남성들이 역설적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왜곡된 방식으로 자신의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 실재하지 않지만 구별되는 작용일반적으로 선과 악이란 사회의 각종 현상이나 사람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구분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가 도덕적 가치로 인정하면서 그것의 확대를 추진하는 것이 선이라면 악은 이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도덕은 사회의 유지에 필요한 규율이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과 평가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높이 평가하든지 반대로 배척하든지 간에 사회 현상이나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일의적으로 그 선악의 판단을 단정할 수는 없다.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계급이 어떤 식으로든 분열되기 마련인데 이 때 계급마다 인정하는 선악의 기준이 다르고 그 평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선과 악의 평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역사적으로 계급의 교체에 따라서 변화가 생긴다고 말했으며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민족과 시대에 따라 선과 악의 관념은 대단히 변천하여 왔으며, 때로는 정면으로 모순되며 충돌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단심가와 하여가로 잘 알려진 정몽주와 이방원의 일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방원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 정몽주의 지지를 요구하지만 옛 국가에 대한 충심 때문에 이를 거절하자 이방원은 정몽주를 대역죄로 처단하게 되는데 후에 새로운 국가가 성립되고 나서 정몽주의 이러한 충심이 새로운 국가에 필요한 규범이 되자 정몽주의 권위를 복권시키게 된다. 이렇게 동일한 신념과 행동이 어떤 시대에는 악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떤 시대에는 선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윤리의 이중성이라 불리는데 선과 악이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으며 그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옛날부터 있어왔던 전통적인 선과 악에 대한 정의와 성질에 대한 논의에는 선과 악은 항상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며 양립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서 선과 악이란 서로 반목하고 대립, 투쟁하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에서 나타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실재로써 존재하지도 않는 선과 악의 대결을 통해 선이 이겨야만 행복해진다고 믿을 것이 아니라 둘의 동일성을 인정하고 구태여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선과 악은 사실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서로 구별되는 작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 지배 없는 자발적 착취오늘날 육체적인 노동과 정신적인 노동을 불문하고 우리가 노동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한 가지이다. 바로 직접적인 생존의 필요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준비이다. 물론 개인적인 자아성취감과 자아실현을 위하여 노동하는 노동 주체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의견은, 노동의 이유가 사회의 물적 생산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인 만족감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다. 일은 사회적 능력을 의미하고, 성과는 그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생산 시스템과 개인이 완벽히 일치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이 만족감은 생산의 체계가 점점 팽팽해져가면서, 갈수록 드물어지게 되었다.다양한 뉴스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최근의 소식이 있다. 경제성장률 둔화, 소비경제 위축,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기 침체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기업은 이윤창출과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성과와 생산성, 효율이란 단어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 중심에 서 있는 청년층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청년층에게 붙는 다양한 수식어가 현재 대한민국 청년들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삼포 세대’이다.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란 의미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청춘들을 위해 사회는 달콤한 유혹을 던지기 시작했다. 바로, ‘긍정성’의 대두이다. 긍정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고 긍정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 말한다. 이 외침에 반응하는 청춘들은 ‘할 수 있다’라는 정언을 다짐하며 스펙전쟁에 돌진했다. 우리 사회가 ‘성과 사회’로 들어서게 되면서 우리는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예를 들면 우울증, ADHD, 소진 증후군, 경계성 성격장애 등을 앓게 되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공격에 의한 질환들과 달리 이런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로서, 면역학적 기술로는 극복할 수 없다. 긍정성의 과잉, 부정의 부재가 노동 주체를 소진시키고 피로하게 한다. 사회적 생산력의 끝없는 향상을 위해 생존하는 ‘노동하는 동물’이 자신의 피로에 대해 책임질 대상을 질타하려 할 때, 그 ‘동물’은 스스로를 그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고는 한다. 여기서 잠깐 로런스(D.H lawrence)의 소설 『연애하는 여인들』로 눈을 돌려보자. 이 소설에서 주인공 제럴드는 이미 이런 아이러니한 사회구조의 지배적 상황을 의식적으로 구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자기 자신 역시 거대한 생산 시스템의 한 기능으로 자리매김하고 스스로를 착취하며 이것을 일종의 자유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사회적인 생산 시스템은 한 인간으로서의 지배자 혹은 권력자를 대신하며, 노동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대타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유기적인 삶을 강조하는 현시대에서 노동 주체들에게 이런 생산 시스템은 매혹적이며, 여기에서 자기 강제와 자기 착취의 동력을 얻게 된다. 시스템적인 지배가 내적인 지배, 지배자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지배이긴 하지만 착취의 방식과 그에 대한 차별, 평등에 반하는 분배 방식임에는 변함이 없다.‘휴학하면 뭐 할 거야?’ 대학생이라면 몇 번쯤 들어봤을 만한 흔한 질문이다. 객관적인 호기심을 표현하도록 잘 조율된 문장구조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실은 휴학 기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의미한다는 것을 대화하는 주체들은 알고 있다. 학업을 쉬는 기간이라는 의미는 암묵적으로 사라진지 오래이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란 책을 통해 현대인들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불안을 지니고 있고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한 일상을 살아낸다 말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자, 우리가 성과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고 성과와 성공을 율법주의적인 관점에서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멸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성공은 좋은 것이다. 문제는 동기와 목적이다. 무엇을 위한 성과와 성공인가. 현대사회의 피로는 지극히 불순한 성공과 성과이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자아의 실현과 존재가치의 완성일 것이다. 인간은 나의 나됨, 인간됨의 충만함 속에서 알 수 없는 우주의 신비를 경험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성과는 달콤한 바이러스, 즉 이빨을 섞게 하는 불량식품과도 같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매혹의 신비는 몸과 영혼에 좋지 않을 것일수록 더 자극적이며 중독성이 강하다. 종국엔 파멸을 고한다. 오늘날의 성공과 성과, 그 이면에는 영혼의 파탄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자살, 가정의 파탄, 학원폭력, 인간성 상실 등과 같은 비윤리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긍정은 행복이며 만족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긍정성 과잉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더불어 달콤한 유혹으로 알 수 없는 성과와 인정에 목마름을 더 가져온다. 만족이 없다. 피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