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빈센트 반 고흐에 대하여 조사하고 알아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측두엽 기능장애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사후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에 미친 반 고흐의 영향은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수집을 보유하고 있다.고흐의 생애는 널리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쓰던 편지들안에는 고흐의 생애가 자세히 적혀져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센트 반 고흐는 어렸을 적부터 감수성이 무척 예민한 아이였다.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달랐는데, 사람들이 모두 빨간 해를 그릴 때 해는 노랗다며 노란 해를 주장하는 등 자신이 바라보는 시각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고흐는 아름다움이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美를 위한 미술이 아닌, 현실 그대로를, 자신의 심정과 시각을 표현하기 위한 미술을 하였다. 그래서 초상화를 의뢰받고 그려 줄 때, 의뢰인을 더욱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아닌 주름살이 있으면 있는대로, 살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그대로를 그렸기에 의뢰자의 입장에선 불쾌했지만 고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고흐의 성격은 가족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 고흐를 이해해주는 것은 동생 테오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고흐의 그림은 미쳤다고, 괴상하다고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Anton Mauve)[4]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1885년과 1886년 사이의 겨울에 반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외젠 시베르트 교수에 의해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어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몇몇의 초상화도 일본화를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등의 걸작들을 그렸다. 즉, 고흐의 그림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18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그의 집에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를의 주민들은 그를 ‘미친 네덜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그는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1890년 7월 27일, 빈센트 반 고흐는 들판으로 걸어나간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는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 총상은 치명적이어서 심하게 앓고 난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앞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몇개월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도 매독을 앓다가 죽었다. 두의 네덜란드 화가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다.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그는 다양한 갈색조, 회색조, 흑색조의 색채를, 음영이 뚜렷한 회화 기법을, 눈에 그대로 보이는 거친 붓자국이 있는 진하게 칠한 채색 기법을, 그만큼 더 강렬한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옛 거장들이 그림들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주 경탄해마지 않았고, 반 고흐 자신도 평생 동안 이 원칙을 고수했다.“옛 홀란드 그림들을 다시 볼 때 나를 당혹시키는 것은 그들이 대개의 경우 아주 빠르게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한스, 렘브란트, 루이스달이나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위대한 거장들이 가능한 한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린 다음에 더 이상 그 그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 반 고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내용적으로 고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루었다. 반 고흐는 '홀란드 시기'에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 수공업자들을 그렸다. 정물화에서는 특이하게도 감자가 자주 발견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에 진실될 것과 분위기, 감정 혹은 생각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런 요구가 자신이 모범으로 생각하는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충족된 것으로 생각했다.감자먹는 사람들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그림은 1885년에 그려진 〈감자먹는 사람들〉이다. 그 그림에서는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 고흐는 그 그림으로 시골 사람들이 땅과 맺고 있는 상태와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는 이 그림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빠듯한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을 고용했고, 여러 장의 습작을 그렸다. 〈감자먹는 사람들〉이후로 반 고흐는 더 이상 여러 인물들이 배치된 작품을 그리지 않았고, 단 변화로 귀결되었다.파리에서 그는 그 당시에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인상주의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그는 인상주의를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양식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반 고흐는 인상주의의 여러 요소를 자신의 회화에 받아들였다. 그는 좀 더 밝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했고, 가는 선으로 그은 듯한,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 놀림으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화면을 보색 관계를 이루는 색채로 구성했다. 외젠느 들라크루와의 그림과 만남으로써 좀 더 대담해진 색채 사용으로의 방향 전환이 강화되었다. 주제상으로 보자면 그는 파리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였다. 파리 주변의 시골에서도 그는 자주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봄날의 낚시〉, 〈클리시 다리〉, 〈아스니에르의 다리 모습〉,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소밭〉등이다.몽마르트 언덕의 초상화, 1887년하지만 그의 예술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일본 판화와의 만남이었다. 1853년 일본은 국경을 개방했으며,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점점 더 판화를 찍은 종이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많은 미술가들이 전혀 새로운 미술에 열광을 했고, 반 고흐도 매혹되었다. 그는 일본 채색 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 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의 미술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의 형상 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실제적으로 그 이후부터 제작된 그의 그림에는 이런 저런 '일본적' 형상 원칙이 나타났다. 몸 때문에 생긴 그림자의 부재, 가는 선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진 '얕게' 채색된 화면, 이례적인 원근법, 풍경 속에서 아주 작게 묘사된 인물들이 그런 원칙들이었다.예술가의 방〈예술가의 방〉이라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반 고흐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그림자가 제거되었고, 색채는 일본 목판화에서처럼 얕고 단순하게 칠해졌어. ”1888년에 제작된 꽃이 만개한 과일 나무 연작의 경우처럼 소재의 선택에서도 부분서 아를로 이주를 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실제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나란히 사용했던 순수하고, 강력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는 '지방색', 다시 말하자면 대상의 자연적인 색을 넘어섰다. 종종 그는 색채를 과장하거나 그가 각각의 그림을 위해서 발전시킨 색채 체계에 적합하도록 사용했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는 초록색 하늘, 분홍색 구름, 짙은 청색의 길이 있다.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적고 있다.“ 나는 색채의 위치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였어. 나는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하는 문제는 더 이상 내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결코 야하거나 벽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머지 색을 약화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중간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조화로운 전체 효과를 만들어낸다.밤의 카페 풍경그 이외에도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상징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밤의 카페 풍경〉(1888년)처럼 색채는 분위기를 표현해야만 한다고 한다.“ 나는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무시무시한 인간의 정열을 표현하려고 했어. 공간은 푸르고 붉으며 생기없는 노란색이지. 가운데에 초록색 당구대가 놓여 있고, 오렌지색과 초록색의 둥근 불빛을 만들어내는 레몬처럼 노란 4개의 램프가 있지.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 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수단으로 사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