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장보고와 청해진
1.1. 장보고의 출신과 활동
장보고의 출신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장보고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 주변의 서남해지방으로 추정된다. 이는 장보고와 함께 활동했던 그의 친구 정년이 바다 속에서 수영하는 능력이 뛰어나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는 기록과, 장보고가 귀향할 때 정년이 청해진에 있는 장보고를 찾아간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장보고가 특별한 이유 없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장보고의 고향이 완도 주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명칭은 우리나라에서는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그가 활과 창을 다루는 데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는 각각 장보고(張保皐), 장보고(張寶高)로 나와 있다.
장보고는 신라 하대 혜공왕 이후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에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에서는 귀족들의 왕위쟁탈전, 농민들의 수탈 등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당나라나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장보고도 이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정착한 이후 무령군 소장이 되어 당의 반란세력인 이사도 일가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30세 정도의 나이에 소장직에 올랐다. 그러나 곧 당의 감군정책으로 군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1.2. 청해진의 설치 목적과 의의
청해진의 설치 목적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장보고는 828년 신라로 귀국하여 흥덕왕의 용인을 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의 설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해적 소탕과 노비매매 근절이다. 장보고는 당에 머무르면서 신라인들이 해적에 붙잡혀 노예로 팔리는 참담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에 장보고는 해적 퇴치를 통해 노비매매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해적 소탕이 청해진 설치의 가장 일반적인 목적이었다. 이는 장보고와 신라조정의 공통된 이해관계였으며, 청해진의 군진적 성격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목적이었다.
둘째,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장악이다. 장보고는 당에서 살면서 동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로를 활성화시키고 그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장보고 개인의 목적이었으며, 신라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청해진 설치는 해적 소탕과 노비매매 근절이라는 신라조정과 장보고의 공통된 목적 아래 이루어졌다. 그리고 장보고는 청해진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청해진의 설치는 신라의 서남해안 지역에서의 해상질서 유지와 국제무역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완도는 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주요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였기에, 청해진의 설치는 신라의 대외 교류와 국가 재정 확충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장보고의 활동을 통해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 무역망이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1.3. 청해진의 역할과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
장보고는 당에 머물면서 동북아시아 삼국을 잇는 국제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주도하였다. 그는 이 네트워크를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해적 소탕과 함께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청해진은 해적 소탕을 통해 신라 백성들의 노비 매매를 근절시키고 해양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통해 당,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주도하였다. 적산 법화원을 건립하여 재당 신라인들을 결집시켰고, 이들을 통해 당과의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에 자신의 우호세력을 형성하여 일본과의 해상무역도 활성화시켰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기반으로 정치적·군사적으로 독립성을 가지며 대규모 해상무역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기존에 이용되던 동아시아 바닷길인 서해 북부 연안항로, 서해 중부 횡단항로 이외에 서해 남부 사단항로를 개척하여 활성화시킴으로써 신라·중국 남부지역·일본을 연결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청해진은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의 핵심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1.4. 청해진 설치와 초기 청자 생산단지의 관계
청해진 설치와 초기 청자 생산단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장보고는 828년 신라로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청해진 인근 지역인 강진 대구면과 해남 화원반도 일대에 대규모 청자 생산단지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청자 생산단지는 장보고가 국제 해상무역을 주도하기 위해 청해진을 건설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해진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초기 청자 유적을 통해 볼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이 일대에 청자 생산단지를 조성하여 신라와 일본으로 수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화원반도의 당포라는 지명과 구림리 지역의 성황을 이루던 항구의 존재는 이 일대가 장보고의 해상무역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강진 대구면과 해남 화원반도 일대에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