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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리학자 알버트 마이클슨
1.1. 마이클슨의 생애
마이클슨의 생애는 그의 과학적 업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마이클슨은 1852년 12월 19일 폴란드의 작은 도시 Strelno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인종차별 문제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있던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이클슨이 2살 때 가족은 뉴욕에 잠시 거주했으나, 이후 캘리포니아의 금광촌인 머피 캠프로 이주했다. 이 때 마이클슨은 거대한 광부들 사이에서 지냈으며, 이러한 환경이 마이클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도 한 연주자가 마이클슨에게 바이올린을 소개하고 연주법을 가르쳐줌으로써, 음악이 마이클슨의 삶을 즐겁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마이클슨은 13살에 샌프란시스코의 남자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선생님은 마이클슨의 뛰어난 공학적 재능을 알아채고 격려해주었으며, 학교의 기자재들을 관리하게 했다. 하지만 마이클슨의 학창시절은 혼자였으며 친구가 많지 않았다. 1869년 여름, 마이클슨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마이클슨은 이후 과학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데, 그의 어머니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아버지는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했다. 마이클슨은 워싱턴 DC에 있는 백악관까지 찾아가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여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9년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73년에 졸업했으며, 특히 광학과 음향학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처럼 마이클슨의 생애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의 과학적 재능이 발현되고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1.2. 마이클슨의 업적
마이클슨의 업적은 "과학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라 평가받는다. 그는 광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빛의 속도를 정밀하게 측정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마이클슨은 1877년부터 빛의 속도 측정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착수하였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광속이 일정하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빛의 속도가 어떤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마이클슨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실험을 진행하여 1983년 29,974km/s의 빛의 속도를 측정하였다. 이는 현재 알려진 광속인 약 30만km/s와 매우 근접한 결과였다.
마이클슨은 광속 측정 실험을 위해 간섭계라는 정밀 측정 장치를 고안하였는데, 이 장치는 이후 광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에 활용되었다. 특히 간섭계를 통해 마이클슨은 1919년 지구조석을 관측하여 지구상 특정 지점이 하루 2회 상하 운동을 한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처럼 마이클슨의 연구는 광학과 천문학뿐만 아니라 상대성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광속 불변의 원리를 실험적으로 확인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마이클슨은 190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3. 마이클슨 간섭계
Michelson 간섭계는 1881년 Albert A. Michelson이 설계한 정밀한 실험 장치이다. 이 간섭계는 빛의 파장을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며, 후에 에테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에 사용되었다.
Michelson 간섭계는 Thomas Young의 이중슬릿 실험의 원리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Laser에서 쏘아진 빛은 반사광학 장치인 beam splitter에 의해 두 개의 경로로 나누어지게 된다. 하나의 경로를 따른 빛은 고정된 반사경 M2에 반사되어 다시 beam splitter를 통과하여 screen에 도달한다. 다른 경로를 따른 빛은 움직이는 반사경 M1에 반사되어 다시 beam splitter를 통과하여 screen에 도달한다. 두 경로를 거쳐 온 빛은 screen에서 간섭하게 되어 간섭무늬를 형성한다.
M1 반사경의 위치를 변화시키면 두 경로의 광로차가 달라지게 되고, 이에 따라 screen 상의 간섭무늬가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간섭무늬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빛의 파장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또한 이 간섭계를 이용하면 광학 매질의 굴절률, 압력, 온도 등에 따른 광로차 변화도 측정할 수 있다.
Michelson은 이 간섭계를 사용하여 카드뮴 적색광의 파장을 정밀하게 측정하였고, 이를 통해 미터 원기의 길이를 결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이 간섭계를 이용하여 빛의 매질로 추정되었던 에테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였고, 이는 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발전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Michelson 간섭계는 현재에도 정밀한 길이 측정, 표준 시간 비교, 천체 관측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현대 광학 및 양자 물리학 분야의 연구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1.4. 마이클슨과 광속의 일정성
마이클슨은 광속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시 빛의 본성이 파동인지 입자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만약 빛이 파동이라면 그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인 에테르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지구가 공전하면서 이 에테르 속을 지나가므로, 지구의 운동방향에 따라 빛의 속도가 달라져야 한다.
마이클슨은 이를 검증하기 위해 정밀한 간섭계를 고안했다. 이 간섭계는 빛의 경로 차이를 측정할 수 있는 정밀한 장치였다. 마이클슨은 이 장치로 지구의 공전 방향과 수직한 방향으로 빛을 보냈을 때와 공전 방향과 나란한 방향으로 보냈을 때의 속도 차이를 측정해 보고자 하였다. 이론대로라면 두 경우의 속도 차이가 관측되어야 했다.
그러나 실험 결과 예상과는 달리 두 경우의 빛 속도 차이가 전혀 관측되지 않았다. 이는 빛의 속도가 관찰자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항상 일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이클슨은 이 결과에 당황했지만, 결과를 무시하거나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이 마이클슨의 실험 결과에 주목하여 상대성 이론을 개발하게 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광속 불변의 원리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야 성립하는 것이었다. 즉, 마이클슨이 확인한 광속 일정성이 기존 물리학의 가정들을 뒤엎고 새로운 물리학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 것이다.
이처럼 마이클슨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통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 그는 예상과 다른 실험 결과를 과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과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 즉 편견 없이 관찰하고 실험 결과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수학자 명단
2.1. 카발리에리
카발리에리는 이탈리아의 수학자로, 천문학, 계산 기술, 원뿔곡선, 삼각법 등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연속체를 불가분량을 사용한 새로운 방법에 의해 설명한 기하학"에서 정리한 불가분량의 방법의 창안이다. 이는 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1632년 11자리의 삼각함수 로그표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카발리에리는 다양한 수학 분야에 걸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특히 "불가분량"의 개념을 도입하여 미적분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2.2. 존 월리스
존 월리스(John Wallis)는 영국의 수학자로, 극한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다루었으며 미적분법(微積分法)에 대한 길을 열었다.
월리스는 F.B.카발리에리와 데카르트의 생각을 발전시켜 극한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다뤘다. 이를 통해 그는 미적분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그의 저서 《무한소산술(無限小算術)》(1655)에서 미적분법에 대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또한 월리스는 무한대에 대해 ∞의 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수학사》(1673) 저서는 수학사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종합하면, 존 월리스는 극한 개념의 수학적 정립과 미적분법의 기초를 제공한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라고 할 수 있다.
2.3. 배로
영국의 수학자 ·신학자 배로(Isaac Barrow)는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등의 고전적 저작의 해석에 주력하는 한편, 광학과 기하학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개척하였다. 특히 페르마의 접선법의 발전과 미분 ·적분이 서로 역관계에 있다는 증명은 미적분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배로는 163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삼위일체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아 1649년에 삼위일체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신학과 수학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 등 고전 수학자들의 저작을 탐구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배로의 대표적인 업적은 미분 ·적분이 서로 역관계에 있다는 점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1660년대에 페르마의 접선법을 발전시켜 미분과 적분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는데, 이는 미적분학의 기초를 닦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그는 광학 분야에서도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빛의 굴절과 반사 현상을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배로는 당시 영국 대학가에서 저명한 인물로 인정받았으며, 1677년 삼위일체 대학의 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677년 8월 4일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배로의 업적과 사상은 17세기 영국 수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연구는 미적분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광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 등 고전 수학자들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4.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은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로, 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였다. 그의 수학에서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뉴턴은 1642년 12월 25일 잉글랜드 린컴셔 주 울스트로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소농이었지만 일찍 사망하여, 어머니 한나 아이솔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뉴턴은 어려서부터 우수한 두뇌를 보였으며, 1661년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수학에 특히 관심을 가졌고, 1665년 흑사병이 창궐하여 대학이 문을 닫았을 때에는 2년간 고향에 머물면서 자신만의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때 그는 중력의 법칙, 백색광의 분광, 미적분법의 창안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1667년 캠브리지 대학에 복학한 뉴턴은 1669년 22세의 나이에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1687년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출판하여 전통적인 역학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 책에서 그는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행성의 운동법칙을 정립하였으며, 운동 방정식을 유도하여 역학을 체계화하였다. 이는 당시 과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를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뉴턴은 수학적 물리학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물리학에 대한 수학적 접근법을 개발하여, 종전의 비수학적이고 관찰 중심적인 자연철학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의 저작 《광학》(1704년)에서는 백색광의 분광 현상을 연구하여 광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뉴턴은 종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자신만의 독특한 교리를 만들었다. 그는 아리우스파적 신론을 주장하였으며, 성서 해석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의 종교관과 과학관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였다.
1727년 3월 31일 런던에서 8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뉴턴은 영국 최고의 과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근대 과학의 기초를 닦은 거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5.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자연과학자 ·법학자 ·신학자 ·언어학자 ·역사가로 활동했다"" 라이프니츠는 수학에서 미적분법의 창시로,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론(單子論)을 저술하여 철학 분야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단자론에서 그는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를 '단자'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실체로 보았다"" 이를 통해 세계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수학,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