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한국사진사에 대한 개관
1.1. 사진의 기원과 수용
고조선의 유적과 고대 천문관측에서 우리나라의 사진적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나무팍무덤,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에서 수천 수백 개의 다양한 빛깔의 유리구슬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 시대부터 질 좋은 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진, 초도의 기원전 10세기의 원시 유적에서 볼록거울이 발굴되었으며,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유적에서는 오목거울도 발굴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불을 얻을 수 있는 볼록렌즈 등도 사용되었으며, 장식용으로 금오목거울, 또는 금화경을 요대(허리띠)에 매달기도 했다. 신라에는 광학경과 화경(볼록 렌즈) 같은 화주가 7세기 초에 인도에서 직접 또는 중국을 거쳐 반입되었으며, 이 시대에 이미 렌즈에 대한 광학적 현상을 이해하고 연구해 수정을 연마해서 렌즈를 만들어 사용했다.
세종 14년에 대규모 천문의상을 설치하기 위해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가 준공되었다. 이 간의대에는 옆에 혼천의, 혼상 등과 함께 일종의 해시계 역할을 했던 동표가 세워졌다. 규표는 구리로 만든 기둥을 표라 하고 그 그림자를 재는 부분을 규라고 하는데, 세종은 40자 높이의 구리기둥을 만들어 세우고 청석으로 만든 규에 눈금을 새겨 태양의 고도를 관측했다. 그리고 이 동표의 그림자를 관측하기 위해 영부라는 보조기구를 사용했는데, 이는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였다. 이로 보아 세종 시대에 동표의 그림자를 관측하는 데 핀홀 카메라, 즉 사진의 원리를 활용했다.
조선 시대의 서구 과학지식 수용은 주로 중국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두원은 1631년 진주사로 중국에 가서 이탈리아 선교사 로드리게스를 만나 여러 서양 문물을 접했고, 특히 [원경설]과 [천리경설] 등의 서적을 기증받았다. 이후에도 청나라의 북경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접촉이 지속되면서 천문, 역학, 수학, 지리학, 의학 등의 근대 과학 서적과 천주교 문물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정조 시대에 설치된 규장각도 서구 문물 수용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칠실파려안의 이론적 수용이나 관측 도구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사진 교육기관의 등장
YMCA의 사진과 개설 이전까지 사진술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개별 사진관에서 견습을 받거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점차 사진이 대중화되고 이에 따른 사진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YMCA 사진과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다양한 규모의 사진학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경성에는 남영동의 일선 사진기사양성소, 충무로 1가의 경성사진전문학원, 와룡동의 조선기공전수학원, 낙원동의 동광사진학원, 정동의 경성사진학원 등 많은 사진학원이 문을 열었다. 지방에서도 원산 본정의 조선사진전문학원, 평양 이문리의 조선사진전문실습원, 대전의 남성사진전습학원 등 다수의 사진학원이 설립되었다.
이들 사진학원의 교육 기간은 학원마다 다양했는데, 대개 1개월, 45일, 2개월, 3개월 등의 속성과정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속성과 외에 특별과를 두기도 하고, 주간부와 야간부, 본과와 연구과 등 다양한 편제의 교육과정이 마련되었다. 일부 학원에서는 실지교육과 더불어 통신교육을 겸하기도 하여 전국적으로 사진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이렇게 다수의 사진학원이 등장하면서 학원 간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를 반영하듯 신문 광고를 통해 속성으로 사진사가 될 수 있다는 보증과 함께 취업 알선 등을 내걸어 수강생 모집에 나섰다. 이는 당시 사진이 점차 전문직으로 자리 잡아 가면서 이루어진 변화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늘어나고 사회적 진출이 증가하면서, 이전에는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사진사 직종에 여성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1926년 근화여학교에 여자사진부가 설치되었고, 이홍경이 사진부 학생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는 여성 사진 교육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처럼 YMCA 사진과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사진학원이 등장하면서 사진 교육의 기회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여성들에게도 사진 교육이 제공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사진 교육이 보편화되고 확산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1.3. 예술사진 개념의 정립
1920년대 들어 사진이 점차 대중화되고 그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진사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다. 이에 따라 영업사진사들의 모임인 경성사진사협회가 1926년에 창립되었다. 여기에서 한국 사진 문화의 정신적 토대가 마련되었고,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사진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 협회의 구성원들은 예술사진을 도입하고 사진의 표현 가능성을 예술사진에서 모색하였다.
예술사진은 소재나 촬영 방법보다는 인화 방법에서 그 특징이 드러났다. 고무 인화법, 브롬오일, 카본티슈 등의 특수 인화 기법을 사용하여 스트레이트한 영상을 회화적인 분위기로 전환하였다. 이를 통해 고상하고 우아한 맛을 드러냈으며, 선예한 영상에 싫증을 느낀 사진가들이 연초점 렌즈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친근감 있는 소재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으로도 예술사진을 구현하였다. 화면 구성을 그림처럼 아름답고 고상하게 완성도 있게 표현하는 구도주의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1928년에는 정해창에 의해 최초의 예술사진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진을 예술사진이라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후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과 함께 예술사진 개념이 확장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다양한 소재와 자유로운 표현 방식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예술사진이어야 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사진 공모전 입상이 최종 목표가 되었다.
이처럼 1920년대부터 시작된 예술사진 개념은 회화적인 표현 기법과 아름다운 소재 표현 등을 통해 사진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정립되었다. 이는 당시 사진이 여전히 회화와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진가들이 사진의 고유한 표현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1.4. 해방 이후 사진계의 변화
해방 이후 사진계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사진계는 일본인들의 지배하에 놓여있었으나,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이 주체가 되어 사진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해방과 함께 사진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사진단체를 재편성하고 다양한 사진행사를 개최하였다. 1945년 9월에는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창립되었고, 이후 서울인상사진연구회, 서울사진가협회, 전국사진가연합회 등 서울에서 다수의 사진단체가 조직되었으며, 평양사진가협회, 경북사진문화연맹, 부산예술사진연구회, 전남사진연구회 등 지방에서도 사진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사진계에서 과거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성이나 청산 노력은 부족하였다. 오히려 과거 일본인들과 함께 해온 사진적 경험이 기준이 되고 평가의 척도가 되어, 해방의 역사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사진 활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또한 사진 재료의 부족이라는 일제 잔재도 물려받아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사진계의 또 다른 변화는 리얼리즘 사진의 대두이다. 6.25전쟁의 체험은 사진가들로 하여금 리얼리즘 사진 표현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였다. 1952년 부산에서 개최된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 회원전에서 사진가들은 과거의 사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리얼리즘 사진 표현을 시도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사진작가들의 해외 사진전 진출도 주목할 만하다. 1952년부터 시작된 국제 사진전 출품은 초기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1960년대 후반에는 50여 개국에서 4천여 점의 작품이 입선되는 등 한국사진의 국제 진출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해방 이후 사진계는 기존 사진활동의 청산이나 반성보다는 과거 일제강점기의 행적을 이어받으며, 다만 리얼리즘 사진의 대두와 해외 사진전 진출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1.5. 리얼리즘 사진의 대두
1950년까지는 한국 사진의 초창기로서 살롱사진(Salon Picture)이 주류 사진이었으나, 1950년대에 일어난 한국 전쟁 등 여러 가지 사회 변화를 겪으면서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고발, 묘사하는 경향으로서 리얼리즘 사진이 대두되었다. 즉,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 생활의 모습을 담은 생활 사진을 모티브로 하였다. 좌익 계열의 사진 단체인 '조선사진동맹'을 1948년에 열었고, 이는 1950년대 리얼리즘 사진의 시발점이자 새로운 예술 패러다임의 시작이었다.
《제1회 임석제 예술사진 개인전》(1948. 8. 7-14, 동화백화점 화랑)을 필두로 이후 《신선회 창립전》(1957년)과 《동아 사진 경연》 등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리얼리즘 사진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 시기에는 사진가들이 사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성을 표현하고 사상이나 의미에 있어서 자율성을 추구하였다. 사진 작품에서 초점에서 벗어난 사진, 흔들린 사진, 전경, 중경, 원경 등이 무시된 사진, 거친 입자의 사진 등 주체성이 자유로운 사진들이 등장하였다. 또한 무의식 세계, 초현실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 등 추상적인 소재를 영상으로 표현한 탈 장르의 사진도 유행하였다.
1960~1975년대 한국 사진계에서 주목할만한 현상은 공모전의 유행이다. 사진인들은 개인적인 창작활동보다는 공모전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는 주요 공모전이었던 국전에서의 입상, 입선이 개인 전시회보다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모전은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작가들의 생각과 함께 국전과 동아 사진 경연대회라는 두 공모전의 흥행이 맞아떨어진 데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었다. 국전은 정부 주도로 시행하였지만, 사진인들에게는 고유의 관심사가 되어 동호인들의 등용문 역할이나 자신의 명성을 확인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 민전의 대표는 동아 사진 경연대회였다면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는 대표적인 국전이었다. 동아 사진 경연대회가 엮음 사진 등으로 실험적인 창작활동을 우선하며, 현실에서 바로 나온 듯한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을 선호하였다면, 국전에서는 급히 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 밀려나는 전통적인 삶이나 자연경관 등을 짜인 화면 속에 회화적인 장면으로 집약하며 당시 사진의 주류를 이끌...